서길수 교수의 고구리, 고리 산성 강좌 21강 | 산성을 알아야 왕검 조선과 고구리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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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 외면 사키를 보면은 되게에 들여
사키를 조금씩 조금씩 들여 사키를
이렇게 비스듬하게 들여 사기를 하고에
이게 한 80도 7 80도 쯤
기울어지게 쐈다 이게 안정성을
유지하게 고구리 산성도 밑에는 굽돌이
부분을 들여쌓기 하고 나중에 했죠
훨씬 발달된 형태지만
이때는 이런 식으로 비스도 목에 쐈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성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문 중에 옹성이 있었다는
겁니다
옹성이 옹성이 있다는 것은 굉장히
발달된 성문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우선
성자 산성을 보면이 부분 보세요이
부분 외성문 있습니다 외성이 놈이
이쪽으로 들어가고 요 이쪽으로
돌아와서 어쨌든 적군을 여기 들어올
때도 큰 성이나 적지만 여기에서
적군을 쉽게 방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
냈고 호문 5문도 보면은 여기다
성벽을 쌓고 안에 적대가 안으로
들어왔어요 여기 안으로 들어와 가지고
적군을에 소위 쉽게에 공격할 수 있는
그런 성문을 만들었다 이건 다 옹성의
초기 형태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전면에 고구리
성을 봤을 때 이렇게 성벽이
있고 성문이 있으면 밖에다 적대를
이렇게 쌓 가지고 이게에 적군을 막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게 이제 국내성
평면도 보면 이쪽에도 있었고 이쪽에
가운데도 있었고 그랬죠 이게
이제에 소위 발굴 보고서에 나온
평면도입니다 그래서 적군이 들어오면이
안에 들어오도록 그래서이 안에서
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옹성의 기본적인 건데 그런 면에서 어
여기도 보면은 그런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까 볼까요 지금
이거 그런 형태입니다 이게 예 그런
형태 그다음에 호문을 보면 더
재밌어요
이게이 파문은 마치 국내성 서벽 북문
성도와 거의 비슷합니다 기역자로
그래서 군이 이렇게 통해 들어오게
하고 여기 들어왔을 때 사방에서
공격을 해 가지고 독안에든 쥐가 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고구리 성과
아 굉장히 대비되는 그런 문의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강가 석성의
성문은 전형적인 그 적대 역할을
했어요 성문이 있고 적대를 내는데
여기 보면은 발굴 보고에서 보면
보고서에서 보면 이렇게 성벽이 있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나중에 성문을
다
막습니다 예 그리고 여기선 어 보면은
밖에 이렇게 쭉 내밀어서 쏴요 이런
식으로 그러면 적군이 이렇게 들어오면
들어오잖아요 여기서 다 공격한 거예요
근데 가서 보니까 이게 지금 이렇게
보세요 내미 내 쌌어요 이렇게 이게
지금 제가 사진으로 찍은 겁니다
성벽이 있고 밖으로 이만큼 내었다
적군이 이렇게 들어올 수밖에 없는데
들어올 때 이것은 완전히 도관에 된
주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잘 막았어요
이게 막아 버렸어요
여기를 그럼 이거는 어떻게 된 건가
이건에 마지막에 그냥 어 적군이 못
들르게 막았을 수도 없는 거고 그래서
이걸 저는 어떻게 해석을
했느냐면 현문이라는게 있습니다 현문
성문 중에 현문
뭐냐면 쳐들어 와서 여기도 문이
있는게 아니라 문을
없애고 여기다가 막아 놓고 여기
공격도 하고 여기 와서 또 넘어와야
돼요 여기서 그러면 본인들은 어떻게
다느냐
사다리를 밖에 나갈 때는 사다리를
넘고 다니는 거야 이걸 현문이라
그럽니다
이게 지금 환도산성 한 군데가 있고
신라 상에 이게 많습니다 신라에서
현을 굉장히 많이 썼기 때문에 막
그런 형태라고 저는 지금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치와 각대
window 예 치와 각대 지금 그
강가 석성이 평면도에 이렇게 아까
성문이 여기입니다
성문이 이렇게 이렇게 나왔죠 이렇게
나와 있는데 이게 마면이라는게 치데
꽤 많이 붙어 있어요 그리고 귀퉁이
있는 걸 각대 그러죠 전번에
했습니다만 각대 그래서 치들이 꽤
많이 있다이 아주 발달된 과연 이게
하가점 하층 문화일까
어 좀 욕심을 리면 혹시 그데 유무로
봐서 하가점 친문으로 되는데 이게
요소 10성 정도 되지 않을까 그런
정도 잘 쌌어요 예 그리고 이제 다만
치는 대부분 고구리가 네모를 하는
것에 비해서이 치기는 전부
둥그라미 벽을 쌓고 밖에다가 이렇게
치를 만들어서 이렇게 내 보고 공격할
수 있겠는데 요것은 쌓을 때부터
안으로 집어넣어서 사도 아 튼튼하게
쌌다 워치는 그래서 약간 차이를 두고
있었습니다 하여튼이 성은 굉장히 잘
싸는 성입니다 하가점 하층 석성의 떤
특징을 보려면 여기를 봐야 되는데
이게 이제 수몰이 되고 버려진 성이
되고 참
아쉽습니다 각대 아까 봤죠 이렇게
귀퉁이가 성이 귀퉁이에 있는 성을
각대이라고 합니다 각대 이쪽으로도
공격할 수 있고 이쪽으로도 공격할 수
있고 양쪽이 공 공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죠 그다 삼재 점의 치는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미 15개 여기에
그리고 작은 성에 열개 25개로
하가점 하층 성벽 중에서 가장 많은
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고구리 성엔
치가 굉장히 특성이고 위래 또 많은데
사실은 여기 썼는지 모르지만 어
다음에
보겠습니다이 치 사이의 평균 거리가
4에서 5m 때 고구리 시대
10분지 밖에 안 됩니다 그건 뭐냐면
화를 썼고 여기는 창이나 칼을 썼기
때문에 무기의 차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치의 크기도 그 당시에 가장
큰 5호가 5.5m 도가 가장
큰데 이런 것은 고구리 것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고구리는 내목 골인데 일반적으로 말굽
골이다 그리고 대부분 돌로 세 겹을
쌓고 일부는 두 겹도
있다 그리고 치와 성벽이 돌벽이 서로
맞물려 튼튼하게 빈틈이 없었다 그래서
우료 올라가면서 들를
했다 그다음에 대치 중심에는 황토로
치에 채웠다이 황토로 채운 부분은
고고도 그런 성이 있습니다마는
거기는에 소위 막돌로 채운 경우가
많습니다 돌이 부족해서 그렇지
않을가는 생각도 드는데 그다음에
기술적인 측면도 있었 어쨌든 당시의
그
치에 소위 하가점 하층 문화의 치에
대한 그 소인 종합해보면 이랬었다
지금 여러분 이제 제가 사진과
그다음에 평면도로 지금 보 단면도를
보여 드리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상기
상기병
영자에게 있었어요 이렇게 예 두
가지나
있었죠 그다음에 성 안에 여러 가지
시설이 있었는데 강가정 석성의 가장
철저하게 발굴한 걸 보면 재구동이가
28개
재구동이는 체가 쌓여
있었으니까에 불을 피웠었다 곳일 수도
있
있고 그다음에 그 제 자체를 뭐에다
썼을 가능성이 있는데 연구 대상이
되겠죠 집터가
47곳 돌로 싸온 구덩이가 24곳
창고가 여덟 곳 다 돌로 샀어요 당
담장이
34단 담장이 그게 뭐냐면 그 안에
이렇게 나눠져 있는 겁니다 성 안에
담장으로 그다음에 그 사이 땀 큐로
했는데 그 그 담 큰 담 사이에 또
사이 땀
배수시 열 곳 돌로
쌓은대에 여섯 곳 돌로 만든 홈이
13곳이
있었습니다가 이거 보면 이런 식으로
어 이런 식으로 지금 둥그렇게 요게
이제 담미 쌓여 있습니다 그요 두
집은 담이 있지만 작은 담 이렇게
옆집이 있고 이런 식으로 어 여기에
이제 불 대던 흔적들이 남아 있고 어
그래서 지금까지
그 음하 유역의 석성 성안에 집터
통계가 나왔는데 예 둥군 집터 보셨죠
그다음에 외담 둥근 집터 이중남
네모난 집터 모두 해 가지고 어
상당히 그 수량이 봤을 때 많은데
대체적으로 집터가
둥그렇다음 이런 것들을 우리가 볼 수
있 크기
정도입니다 그다음에 성자산 산성 집터
가장 컸던 수도였다 보는 어 인구를
우리가 간해 볼 수 있는 그런 집터가
228 동이 있었습니다 예 그리고
집과 집 사이에 네모난 뜰이 있었는데
그게 4일 군데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것은 자점 발굴하는 집인데 꼭
이렇게 이중으로 돼 있어요 집터가
이런
식으로 그래서 여기에 이제 이렇게고
지붕이 있었겠죠 있었고 또 요건도
방어를 할 수 있고 또 겨울에 추위도
막을 수 있고 여름에 더위도 막을 수
이중으로 했었다는 거 중간에 틈을
뒀다는 거 아주 재미있는
겁니다 돌구이도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
여러 가지 고라가 여러 가지로 용도가
다양하겠죠 그다음에 이제 내성 문제는
강가 속성에도 있었고 성자에 특히
제가 물론 내성이라는 것은 중공
학자도 얘기하지 않고 국내 학자들도
성이라고 않고 이제 재단 정도로
얘기하는데 저는 재단은 여기서 일부고
요게 내성이라는 보는 겁니다 그다음에
이제 혜자입니다 물론 해자는이 큰
해자는 물이 흘러가는이 강 자체가
혜자입니다 이런 것들이 예
그런데에 성벽이 있으면 거기에 또
구덩이를 파 가지고 접근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던게
혜자다 자 결론을 보겠습니다 하가점
하층문화 성문에서 옹성 형태를 갖춘
성이 존재했을뿐 아니라 꽤 발달한
형태 각대 성문도 있었다 하가점
하층문화
석성은에 매우 발달한 치가 있었다는
것이고 강가은 석성이 모두 16개
아까 봤던 겁니다 여섯 개의 치가
있는데 동벽의 5 6고 치 앞에는에
치는 앞에서 본보와 같이 양쪽에
설치한 적대로 옹성 영광 역할을 했다
성문 앞에 예 동남 모서리에 둥굴
각대 남아 있는데 보존 상태 가치와
하가점 하층문화 석성의 각대 보여주는
좋은 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다음에
자점 아까 특히 자점 지금까지 발굴된
하가점 하층문화 석성 가운데 치가
가장 많이 나온 그런 성으로 큰
성에서는 15개 작은 성에 개에서
모두 어 26개
25개가 되 26개가 되네요 지금
15 개하고 열개 25 개네요 그게
잘못됐네요 예 25개의 치가 남아
있다 과자점 하가점 하측 문화 석성의
치는 대체로 평균 45m 사이에
하나씩
설치되었다 치의 간격이 좁은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아까 제가 이미 말씀을 드렸는데
지성에 비해서
산성은지가 바르고 성벽을 더 튼튼하게
보강하기 위해서 무너지지 않게 막
막는 버틴 목을 같이 생각을 하세요
둘째 일반적으로 후대의 치사의 거리는
당시 보유하고 있는 무기의 사전
거리와 관계가 있다 고구리 성에는
50m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보통인데 청동기 하가점 하층문화
치사의 거리가 고구시 10분지 1밖에
안 된다는 것은 당시의 무기 수준이
원거리를 쏠 수 있는 활이 발달하지
못하고 창이나 칼로 싸웠다는 것을
보여주는거다 그다음에
그밖에 동양 석성 기방 영자 석성
서상근 석성 신점 석성 윤가 석에서도
치들이 발견 있데요 하가점 하층
문화의 성에는 치가 꽤 일반화되어
있었다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런
이제는 왜 하는가 고구리 석성을 제가
책을 쓰면서 치는 이런 목적을
했다라고 했는데 첫째가 효과적인 공격
효과적인 경계 벽체를 보호하는 받침대
넷째 전투할 때 악군 활동 공간
극대기 위한 것이라고 얘기했어요
그런데 이러한 고구리 성에서의 설치
목적은 청동기 시대 석성의 치도
똑같다
실제로 그리고 그러므로 축성술이란
측면에서 볼 때 고구리 석성의 치는
하가점 하층문화 석성 비루 되었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고
본다요 한마디를 쓰는데 굉장히
어마어마한 현장 검증이 필요했어요 왜
그러냐이 논문을 발표하기 전에 나를
포함해서 남북 학자들은 고구리의 치
건 지금 체국 얘기입니다
국 치와 엉성이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치는 거구가 제일 먼저 만든 거야 그
우선 북한 학자가 채우기가 국이가
그랬고 나도 막 따라서 했어요 근데
가서 보니까 아니야 그래서 새로운
자료가 나오면 무조건 바꿔야
돼요 잘못된 거야 예 잘못된 거예 자
최우기 볼까요
예에 여기 보면 공성이 나지는 당시
다른 나라의 성들이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고이 자랑하려고 그런 거죠 그러므로
옹성과 치는 고의 사람의 창안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다 후세 우리나라
성들의 친하 옹성이 생기고 또
이웃나라 성에도 그런 것들이 생긴
것은 고고 생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게 성에 대해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체국 선생의 책에 나온
얘기입니다 근데
제가이에 논문을 쓰고 이걸 현장을
갔다 와서 이건 완전히 뒤집어진 거
치도 온성도 모두가 다 하가점
하층부는 이미 다 나와 있었던 겁니다
예 그래서 이와 같은에 연구 결과가
기존 학설을 갖다가 완전히 새로운
방정을 제시해서 되지 있는 그런
결과를 나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 축성법 통해서 본 고고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제가 그런 논문까지
썼습니다
축성 수리란 측면에서 보면 고구리
석성의 시원이 하가점 하층 문화의
석성이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저는
이제 결론입니다
다만 두 시대의 석성 가운데는 천년이
넘는 시차가 있다는 점은 앞으로
극복해야 될 과제다 근데 대부분
사람들이 시간 문제를 생각안 해요
여기 있어 똑같은 여기 나왔어 그러까
요게 우리 그고 요거 닮은 거야
이렇게 움직였어 이렇게 전파돼서 다
이렇게 생각
됩니다 그래서
제가 하가점 하층문화 석병 석성의
고구리 선과 같은 고리 선과 같은
돌이 있었던 것을 굉장히 주시하고
있는 거예 고구 때 쌓았다 그러면
우리가 하가점 화천 걸 먼저 보고
거구에서 배웠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어떤 문화적인 영향 그 부분을
공부하는 데서 하데 있어서 삼
삼관 전자의 석성이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자 이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고구리 성에 대해서 좀 오랫동안 쭉
설명을 하고 고구리 성의 원 원류는
무엇일까라는 고민 때문에 제가 30년
동안요 지방 요동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찾은 결과 그것은 하가 문화 석성이
원료였던
다만 거기에 천년이 넘는 시차 다시면
그 안에 부여라는 고구 이전에에 이런
여러 여러 가지의 그
시대에에 시대 연결되는
석성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이
문제는 앞으로 해결돼야 될 문제다라고
생각을 하는데 만일 옛날 왕금 왕금
조선 그다음 왕금 조선에 고구리가
현이 있었고 현에 나오죠 어 그리고
고구리가 거기서부터 같이 해서 왔다
그러면이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그래서 나는이 석성을 가지고
우리 당군 조선과 그리고 고리를
연결하는 고리로 만들어 연구를
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지금 그 중공 문이
그겁니다고 그리가 왜 너희들
거예요 너희들은 마한 진환 변한
사만이
있고 그다음에 사만 북쪽에 대동강
이북에는 한사군이 있었어 현토
그다음에 낭낭 그 평양이
낭낭이 그리고 그것이 나중에 고구리가
생겨 가지고 밑에 내려와서 나중에
평양을 차지한 거야 그 그게 그
만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이게 지금
그 그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논리들 대해서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DNA 모든 것을
통해서이 문제 어떤 것이 우리가
우리나라 우리나라는 우리는 뭐예요
우리 민족 군데 우리 민족이
뭐야 하는 기준을 세워야 되는데 저는
그것을 왕금 조성 또는 당군 조선
또는 조선과 고구리 당시의 영역
역사 질의 이걸 가지고 거기 나온
고고학적인 성과를 가지고 지금까지
특히 그중에서도 석성을 가지고 연결
고리를 만들어 봤습니다 이상 강의
[음악]
마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