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며듣는소설 마음에 난 깊은 상처때문에 고향에 왔지만 고향 마을은 이미 오래 전 사라지고 없었다 [회향] 이인록 단편소설 #책읽어주는남자 #오디오북 #책과함께하는하루단잠

책과 함께하는 하루 단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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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며듣는이야기 #잠자리소설
하루의 끝, 조용한 밤.
당신을 깊은 이야기 속으로 이끄는 오디오북 채널, 책과 함께하는 하루 '단잠'입니다.
이번에 읽어드릴 작품은 이인록 작가의 소설 "회향" 입니다. 😊
편안한 하루 되세요.
🛏️ 잠들기 전,
🚶♀️ 혼자만의 감성 산책 시간,
🎧 눈은 쉬고 싶지만 마음은 이야기를 원할 때—
언제든 이곳에 들러주세요.
🎵단잠의 클로징 플레이리스트 https://www.youtube.com/@MnightS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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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라인
00:00:00 인트로
00:01:43 본문낭독
00:48:44 단잠의 아주 주관적인 감상평
00:53:33 클로징 음악 "Praying for you today"
#오디오북소설 #한국문학낭독 #밤에듣기좋은이야기 #감성오디오북 #자기전듣는책 #잠이오는소설 #책읽어주는유튜브 #단잠을위한오디오북 #소설읽어주는채널 #조용한밤이야기 #audiobook #한국소설 #소설낭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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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요약
AI 생성남편의 외도와 죽음이라는 비극을 겪은 윤희가 수몰된 고향 경주 명실 마을을 방문하며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 짝사랑 상대였던 영준과 재회하며, 사라진 공간이 아닌 사람과 기억을 통해 고향의 진정한 의미와 정서적 안식을 되찾는 회복의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인록 작가의 단편소설
회향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인록 작가는
2017년 배웅이라는 작품으로
신라문학대상 소설 부문에 당선되면서
등단을 한 작가입니다.
그 이후
어떤 동행
배웅
그해 여름
16년
합장
그리고
태풍전야 등의 단편소설을
꾸준히 발표해 오고 있는 작가입니다.
또 이들 작품들을 한데 묶어서
16년이라는 소설집을
2020년에 내기도 했죠.
그리고
우리 채널에서도 인연이 깊은데요.
이인록 작가의 작품을
두 편 소개해 드렸습니다.
합장과
탐색전 관정기라는 작품
기억나시죠?
그 두 작품도 이인록 작가의 작품입니다.
혹시 못 들어보셨다면
이번에 감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작품은
2022년
경주문학 70호에 실린 작품으로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입니다.
재미있게 감상해 주시길 부탁드리면서
이제 작품 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끝까지 함께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회향
이인록
결국 KTX로 가기로 했다.
자동차로 4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운전해서 간다는 것이
우선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비하면 편하게 쉬면서
2시간이면 도착하는 곳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서울역까지 나를 바래다 준 승현이는
내 속내와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표정 가득 담고 있었다.
오늘 올라오기엔
늦어지면
정해진 거처에서 하룻밤 자고 올지도 모른다.
승희와 수고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이렇게 정해진 길을 혼자서 가야 한다는 생각은
플랫폼에 내려서는
발길을 가볍게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혼자서 가는 길도 그렇고
기차를 타고 가는 길이
언제 있었던가 생각이 들면서
정다운 몸짓으로 기차에 오르는 사람들 표정이
나와는 대조적이었다.
한강을 건너는 기차의 바퀴소리가
내 마음을 살짝 보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쾌적한 분위기의 열차가
오늘 2시간의 여정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니
열차는 어느새 벌판을 달리고 있었다.
서서히 정상속도를 내는 열차는
벌판과 터널을 번갈아 지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행복과 불행의 공간을
멈추지 않고 달려왔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했고
내가 그 두 곳을 관통한 당사자가 아닐까
단정하고 싶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지나간 세월은 모두 일순간의 일이었다.
그것은 한눈 팔지 않고 살아온 내게는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었다.
지금처럼 적연할 때가 일찍이 있었을까
스스로 자책하고 싶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로 남았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 일이 어쩌면 내게도 책임이 있음을
시시각각 옥죄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고개를 세차게 흔들기도 했다.
경쟁률은 차치하고라도
모두들 쟁쟁한 실력을 갖춘 이들이라고 알게 된 건
합격자들이 모인 신입사원 연수 때였다.
눈빛은 블랙홀도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았고
모두들 재치는 하나같이 개그맨이 그것과 대적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몇 주간 계속된 연수 때
우리는 조금씩 마음을 내비치는 사이로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점심식사 뒤
커피잔을 들고 삼삼오오 모일 때도
우리는 멀찍이서 짧게 눈만 스칠 뿐이었다.
매일 매일 연수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갈 때는
누가 먼저 할 것도 없이
서로를 찾는 눈빛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결정적인 일은
연수를 마치고 부서 발령을 받을 때 일어났다.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은 그와 내가
같은 부서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비로소
우리는 일을 드러낼 만큼 웃음을 나누게 되었다.
둘 다 집이 서울이라는 걸 제외하면
뭐 특별한 동질감은 없는 평범한 사이였다.
며칠 후 티타임 때 그가 불쑥 말했다.
윤희씨
이젠 우리 서로 인사도 하고
입사 동기답게 좀 더 가깝게 지내요.
빈스씨
우리 둘 다 맹꽁인가요?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냈으면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내 대답은 거침없었다.
저는 연수 첫날부터
윤희씨를 유심히 바라보았다는 걸 알아요?
그랬어요?
저는 전혀 몰랐어요.
사실 나는 진심을 숨겼다.
그날 이후 우리가 스스럼 없는 사이가 된 건
부서 동료들이
입사 동기인이 당연한 듯이 바라봐주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신입사원으로서의 입지를 생각하면
업무외적인 일로 동료와의 친밀도를
의식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업무를 익히느라 정신없이 보낸 몇 달 후
민수씨가 퇴근 후
특별한 일 없으면
저녁에 잠깐 시간을 낼 수 있느냐고 물어봤다.
몇 번의 부서 회식 때도 그랬고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동기라면서도 좀 더 살갑게 대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에
잠깐은 된다고 대답했다.
회사 앞에서 택시를 탔다.
이런 공간도 물론이고
둘이서만 가까이 함께 있는 지금이
생경하다는 생각과 함께
부끄럽기도 했다.
다소 긴장한 탓인가
복잡한 퇴근길의 방향감각을
일순 가늠할 수 없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일단 동의한 일이니
가만히 있자 싶은
한참 후였다.
대로를 벗어난 차가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제비원이라는 간판이 보이는 곳 앞에서 택시가 멈췄다.
안동 국시 전문점임을 소개하는 사진이
산뜻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민수씨
저녁 식사하러 온 거예요?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짓는 내게
민수씨가 택시에서 내리면서 말했다.
식사도 해야 하지만
일단 내려보세요.
그가 성큼성큼 앞서고 있었다.
거침없이 들어서는 그와
뒤에서 멈칫멈칫하는 표정의 나를 바라보던
정갈한 가운을 입은 여직원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그가 눈을 찡긋하며 웃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었고
카운터 앞에 선 그가 말했다.
어머니
말씀드렸던
이윤희씨입니다.
나는 뒤로 넘어지는 줄 알았다.
한참 분주하던 분이 우리 둘을 돌아보았다.
오 그래요?
어서와요.
반가워요.
민수 엄마예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중년의 부인이
활짝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그리고는
김실장
카운터 좀 보세요.
차 한잔 들어 보내주고
한 뒤
우리 둘을 카운터 뒤 사무실로 안내했다.
격조있게 꾸며진 사무실에 들어서 나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두 손을 모은 채 머리를 조아리는 내게
민수씨 어머니는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옆의 민수씨는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그래도 내가 자리에 선뜻 앉지 못하자
내 손을 끌며 자리로 앉혔다.
민수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그래, 고향이 경주라면서요?
우리는 안동이랍니다.
나는 고개는 고사하고
대답조차 입 안에서 맴돌았다.
옆의 민수씨가 웃으며 말했다.
회사 업무는 똑소리 나게 한다고 소문이 났는데
부끄러움을 많이 따서 그래요.
부끄러워할 거 없어요.
둘이 같이 식사부터 해요.
나는 밖에 일이 있어서
직원이 가져온 차를 앞에 두고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나는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민수 어머니가 카운터로 가고
우리는 직원이 안내하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안동지방의 전통국시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었다.
나는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표정으로
한마디 말도 없이
사람을 이렇게 당황하게 만들어도 돼요?
라며 눈을 흘겼다.
사전에 말씀드릴 시간 좀 여유가 있어야죠.
용서하세요.
어머니가 자꾸 만나보고 싶다고 해서
이렇게 됐어요.
저녁부터 먹고 나서 바래다 드릴게요.
지나가는 직원들이 우리 둘만 바라보는 것 같은 생각으로
식사를 어떻게 했는지도 몰랐다.
식사를 마치고 민수씨가 어머니께
잠깐 바래다 주고 오겠습니다.
했고
저녁 잘 먹고 갑니다.
라고 민수씨 어머니께 내가 인사를 드렸다.
오늘 정말 반가웠어요.
자주 봐요.
민수씨 어머니가 자동차 키를 내밀었다.
운전석에 앉은 민수씨를 쳐다볼 수 없었다.
약속이나 한 대신
우리는 서로 말을 아끼고 있었다.
입사 원서를 내고
합격 통지를 받고
연수원에서 입사 연수를 받고
같은 부서에 발령을 받고
매일같이 얼굴을 맞이했던 시간들이
몇 번이나 뇌리를 스치고 있었다.
단 한 번의 내색도 없었던 그가
오늘 이렇게 일방적으로 만든 자리에 끌리듯
함께 한 것에
어떤 판단도 할 수 없었다.
회사 내에서
우리 둘의 사이가 알려지고
사내 결혼을 하고
얼마 뒤 둘이 함께 퇴직을 하고
재비원의 가족이 되고
승현이, 승희 남매가
대학교를 마치고
재비원의 경영 수업을 쌓고 있는
지금까지의 세월은
지나고 보니
모두 쏜살 같은 시간들이었다.
그 사이
우리 식당 규모도
인원도
두 배 이상 커졌다.
남편의 사회적 지명도가
식당의 크기를 재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했다.
안동지방 반가에 전승되어온
안동국씨의 전통과
고유한 풍미를 이어간다는 자부심은
가게의 중요한 자산이었다.
특히
골프 회원들의 명소라는 소문은
장안을 망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우 양지로 국물을 내는
안동국씨의 메뉴는
단지 국씨뿐만 아니라
수육과 녹두전
메밀묵과 만두
그리고
문어와 홍어삼합 등은
국씨를 뛰어넘는 맛까지
손님들께 선보였다.
우리 가족 모두는
한 곳을 향해간다는 경영방침대로
한눈팔지 않고
앞을 향해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사 다만은 있었다.
평소 드레진 사람으로 대접받던 남편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조금씩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본인은 황홀한 음모였는지도 모른다.
여자의 촉은
거의 적중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골프 모임 회원들이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모임에는 여자 회원도 몇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회원으로 있는 골프 모임의 회원들 식사자리가
우리 집에서 있던 날
우연히 슬쩍 그 자리를 지나치게 되었다.
모두들 파안대소하는 좌중에서
고개를 숙이며 숨기는 듯한 미소를 흘리는
두 사람이 있었다.
남편과
한 여자였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재미난 얘기거나
골프 경기 중에 있었던 해프닝이 아닐까 짐작만 했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회원들 모두가
마냥 기쁜 얼굴로 나와 인사를 하는데
예의 그때 함께 머리를 숙이며 미소를 흘리던 그 여자가
내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목래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얼굴 좀 봅시다는 듯이 살피려 해도
재빠르게 총총 사라졌다.
고개를 갸우뚱했던 며칠 뒤였다.
골프 모임에 간다며 준비하던 남편이
지나치게 복장에 민감하게 집착한다고 생각이 드는 날
불현듯
그날
그 여자의 얼굴이 겹쳐졌다.
마치
살랑살랑 대던 생각의 꼬리가
쫙 펴진다곤 할까
그래도
책잡을 만한 증거가 없었다.
경주로 오면서
KTX는 처음이다.
두 시간여 만에 내려진 신경주역 플랫폼에 내려서면서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경주를 떠난 그때로부터
남편의 차를 타고는 여러 번 왔었다.
이렇게 혼자서 내리고 보니
어느 먼 도시에 내려진 느낌이 들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옛 경주역은
오랜 세월 숱한 추억과 애환을 담고 있는 곳인데 비해
신경주역은
웅장하면서 차분히 돌아벌 여유를 아사가고 있었다.
우선 까마득한 높이의 역사 천정에 압도되는 듯 했다.
역사 밖으로 나오자
산속에도 이런 역사가 있을 수 있구나 생각되었다.
택시 승강장에 길게 늘어선 택시로 보아
승객들이 제법 몰려드는 모양이었다.
마침
깔끔한 개인 택시가 차례가 되면서
내 앞에 서 있었다.
혹시
덕동댐 안쪽에 있는 명실문중재실을 아세요?
아 예
경주 전체 면적이 서울보다 더 넓지만
어느 골목 어떤 곳을 말해도
저희들 손바닥 안에 있습니다.
명실문중재실엔 무슨 일이 있으신 모양이지요?
수몰된 이후
문중재실이 위로 옮겨졌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내 눈에 익숙하지 않은 곳이고
혼자서 가기에는 낯선 자리가 될 것 같은 염려가 들었다.
명실에 살고 있다는 영준 오빠가 불현듯 떠올랐다.
하지만 기사께 물어보기에는 난감하다고 생각되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수몰되기 전 명실 마을에 살았어요.
수몰 후
마을 위로 옮겨진 재실에 한번 가보고 싶어서요.
늦었지만
그러시군요.
혼자서 문중재실을 찾아가는 사람을
의아하게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용기내서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명실에 사는 박영준 오빠를 아세요?
순간
차가 한번 흔들린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나는 앞자리에 기사를 슬쩍 쳐다보았다.
박영준 선생님이 오빠 되십니까?
친오빠는 아니고
옛날 동네에 같이 살았던 오빠뻔이랍니다.
K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으로
정년 퇴식하신 박영준 선생님이 맞지요?
예, 박영준 오빠를 아시는 모양이죠?
아, 예.
K문화원 같은 회원이기도 하지만
우리 지역에서는 워낙 이름이 남분이어서요.
박영준 오빠.
옛 고향 동네 명실에 살 때
정미소를 하던 우리 집 이웃에
영준 오빠네 집이 있었다.
나보다 두 살 많던 오빠는
덕동초등학교 내에서 명석한 학생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저학년 때부터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던 오빠는
고학년이 되면서
학교를 대표하는 실력을 보였다.
특히 경주시 학생 백일장이 열리면
입상을 걸은 적이 없었다.
전국 대회에서도 발군의 실력은 어김없이
최상위 입상자의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전교 수석을 놓치지 않는 수재로 불리던 오빠는
장차 동네와 학교를 빛낼 동양임이
의심되지 않았다.
그런 영준 오빠를
나는 은근히 마음에 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내색도 할 수 없는 동네였다.
나를 바라보는 오빠의 시선에도
애틋함이 담겨있다고
혼자서만 생각하고는 했다.
한 번은 전교 학예회에서
주인공으로 예쁘게 단장한 내가 맡은 역할을
차질없이 치른 날
동네로 오던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오빠는
명실아
라고 나를 부른 뒤
더 이상 말은 하지 않고
앞서서 뛰어가버린 일이 있었다.
나는 놀라면서도 콩닥거리는 가슴에 손을 대고
오빠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기만 했다.
나를 윤희가 아닌 명실로 불러주는 사람은
동네에서 오빠가 거의 유일했다.
300여 호의 우리 동네에는
명실 문중과 함께
영준 오빠네 박씨 집성촌도 있었다.
어쩌다 길에서 마주칠 때도
오빠는 내 이름을 불렀던 그날을 잊어버렸는지
아무런 기색도 없었다.
나는
혹시 오빠 입에서 내 이름이 다시 불려질까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정말 영준 오빠가 다시
윤희야
하는 한마디를 듣고 싶었다.
평소 오빠가 나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착각이 흐려지고
무덤덤해진 걸까?
실외골 담배집과 함께
구판장에 우리들이 한 번씩 심부름으로 들릴 때 마주쳐도
담담하게 서로 눈을 피하곤 했다.
새술막으로 불리던 덕동상회에서 만나면
볼일이 끝나도 미적거리기만 했다.
우리들이 지나치던 덕동출장소와 덕동지서
제법 컸던 양조장은 동네 중심지였다.
동네와는 외따로 떨어진 곳에 있는 물레방아는
우리들이 가볼 기회는 좀 채 만들어지지 않는 곳이었다.
밤이면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는 얘기가
나중에 낭설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아득한 세월 저 멀리
댐이 만들어질 때까지
우리 유년의 시간은
어느 것 하나 붙들어두지 않고
표현이 흘러갔다.
수몰이 시작된 우리 동네 사람들 일부는
대구와 부산으로 이주해가고
나머지는 댐 위에 조성되는
몇몇 동네로도 집을 옮겼다.
우리 집과 영준 오빠네 집은 마지막으로 남았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유일하게 서울로 가게 되었고
영준 오빠네는 댐 위 명실에 남게 되었다.
서울로 떠나던 날
우리 집 앞에 모인 사람들과
우리 가족은 눈물 속에 이별을 했다.
영준 오빠가 흘리던 눈물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내게 보낸 눈물이라고 믿었다.
서울에 온 몇 년 뒤
고향 소식 중 영준 오빠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염두에 둔다는 소식은
나를 설레게 했다.
하지만 내게 전해진 건
오빠가 대구에 있는 K대학
역사 교육학과에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그 후 소식은
무소식이 소식이었다.
택시는 보호문 단지를 지나고 있었다.
전에는 안 보이던 건물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농협, 경주 교육원과
경주 국립공원사무소 건물이
마치 나를 반기는 듯했다.
세련된 외양을 살피며 왼쪽으로 방향을 틀자
경주 보호문 루지월드 공사장 입간판이
완강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었다.
산등성이 위로 이어지는 철탑을 따라
육중한 전선이 견고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곧 이곳에 명물로 자리잡을
위락시설이 들어설 모양이다.
길은 완만하게 휘어지며 오르막으로 이어지는데
일순간 밀림 같은 숲이 좌우로 펼쳐졌다.
어둑한 길이 환해지나 하는 사이
고개를 넘고 있었다.
내리막길 끝에 와동마을 표시판이
길손을 맞이하고 있었다.
조금 더 내려가자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길 옆에
바윗돌에 새긴 명실 2km 이정표가 보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목이 턱 메어왔다.
지나치는 차창으로 다시 뒤돌아 보았다.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제실에 들어가 보시려 합니까?
가능하다면 들어가 보고 싶은데요.
근처에 제실관리를 하는 분이 계시는데
박선생님을 통하면 좀 쉽게 들어가 볼 수 있을 겁니다.
아신다고 하니 전화 한번 해볼까요?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렇게 불쑥 제실에 찾아와서 만나는 것이
어색하다고 생각된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니
여자 혼자서 제실에 들어가는 것 또한
불충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다.
어쩌면 오빠와 함께 들어간다면
조금은 자연스럽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마저 들었다.
동네 분인이 누가 본다 하더라도
흠은 되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다.
차는 어느새 명실 문중 제실인
만향정 입구에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차 문을 여는 신용을 하면서 말했다.
영준 오빠 지금 집에 있을까요?
그때까지 차 안에서 휴대폰을 만지고 있던 그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아마 오늘은 있을 것 같은데요?
전화 한번 해보겠습니다.
나도 따라서 내렸다.
20월 전 고향 명실 마을에 있던
경주 2시 명실 문중 제실 만향정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여 그대로 재현한 건물로
전체 외관은 단아했다.
아담하다는 표현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대문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절제된 추녀의 멋스러움이
지붕 위로 솟아오른 뒤란의 대나무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대문 위쪽에 안내문이 걸려있었다.
만향정의 고서와 민속품을
2012년 12월 21일 국학진흥원에 기탁하였음을
종중원에 알립니다.
고개를 돌려 호수 저편을 바라보니
땜 기슬개 세워진 만향정이 보였다.
10년 전 여름 준공식이 열리던 날
남편과 나도 참석한 곳이다.
그날 안동에 들른 후 겸사겸사 내려왔었다.
행사 말미에 영준오빠도 남편과 함께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날처럼 오늘도 비가 내린다.
제실 뒷산을 흐르게 하는 비는
조금씩 새차지고 있었다.
나의 속죄를 헤아리기라도 하는 듯한 빗소리가
담장을 휘감으며 나를 향하는 듯했다.
일기예보에서 비 소식이 있는 날이었다.
오늘은 꼭 참석해야 하는 행사가 있어서
가야 한다는 남편에게
비가 제법 올 모양이던데
그래도 가야 하느냐 물었다.
소나기가 내리지 않는 한
부킹이 된 원래 회여서 진행한다고 했다.
그래도 빗길에 조심해서 다녀오시라는 말을 했다.
낮부터 시작되던 비는
저녁이 되면서 소나기로 바뀌고 있었다.
행사를 마치고 저녁을 먹는가 보다 생각했다.
전화를 하려다
별난 가족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그냥 두었다.
손님이 모두 돌아간 식당에서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승현이와 승희 둘은
주택으로 들려보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이젠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빗소리가 새쳤다.
카운터에 앉아서 자꾸 감겨지는 눈자위를
몇 번인가 누르며 잠을 달랬다.
천둥소리가 너무 가깝다고 생각하며 눈을 뜨는 사이
번개가 창문을 뚫고 벽의 시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11시가 지나고 있었다.
뒤이어 마치 우리 집을 향하기라도 한 듯이
천둥이 고막을 찢듯이 내리꽂혔다.
소름이 확 끼쳐왔다.
이토록 늦은 시간까지 어디 있을까
초조가 몰려왔다.
그냥 기다릴 수 없다는 생각에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지 않았다.
천둥과 번개는 쉬지 않고 이어졌다.
의자를 뒤로 돌려서 다리를 펴자
졸음이 끝없이 몰려왔다.
비가 조금 수그러들면 오겠지 하고 눈을 감았다.
빗소리와 천둥소리가 어느 순간 아득하게 멀어지는가 하는 생각으로
잠속으로 빠져든다고 느껴질 때였다.
가게 전화벨이 울렸다.
깜짝 놀라서 수화기를 들며 시계를 보니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당연히 남편인 줄 알고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제비원 식당입니까?
예 제비원입니다.
가평경찰서입니다.
이 시간에 경찰서라는 말에 다리가 후둘거렸다.
차분하게 말하고 싶었다.
가평경찰서요?
이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
전화기 저쪽에서 잠시 주저하고 있는 듯하고
옆에 누구와 대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교통사고인데요.
확인을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무슨 확인을 말씀인가요?
차량번호와 인상착의
그리고 유류품에서 나온 명함과 운전면허증으로
남편이 틀림없었다.
사고시간이 밤 11시로 추정된다는 말에
나는 다리가 푹 꺾이며 쓰러지듯 엎어졌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택의 승현이를 깨웠다.
가평경찰서에 갔다가 공공대학병원으로 달려갔다.
참혹하게 손상된 외모를 확인한다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방금 도착하여 아직 장례식장을 정하지 못한 시신은
영안실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동승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여자로 춘천 사람이라 했다.
트렁크에 두 개의 골프채도 있었다고 했다.
빗길에 중앙선을 넘어온 덤프트럭에
에코수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찌그러졌고
운전자와 동승자 얼굴은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했다.
동승자 가족인 듯한 어느 사람들이
내게 보내는 눈빛이 험악했다.
황망한 표정을 짓던 그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정숙한 여자를 어떻게 꾸득여서
멀쩡한 한 가정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 했느냐?
나도 소리치고 싶었다.
춘천에서 서울이 어진데
골프를 치러 온단 말인가?
오더라도 자기 차로 오면 되지
왜 남의 차에 동승했느냐?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어떻게 꼬리를 접기에
멀쩡한 사람을 사지로 끌고 가려 했느냐?
며칠 전 우리 집 식당에서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바로 그 여자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틀림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깊이로 엮어진 사이였을까?
춘천 사람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 빗속에서 춘천까지
바래다주러 가는 길이었을까?
아니면 골프 모임에 왔다가
차가 고장이 나서
춘천까지 바래다주러 가는 길이 아니었을까?
비오는 날 골프 모임이
애초에 없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단 둘의 시간을 위해
천벌받을 짓이 오늘 처음일까?
오만 가지 생각은 감쪽같이
나를 속였다는 괘씸한 생각으로 이어지며
나를 몸서리치게 했다.
우리 집을 수없이 드나들면서
내 앞에서는 피하는 척 하면서도
뒤에서는 혀를 날름거렸을 거라고 생각하자
참담함과 함께 현기증이 일어났다.
소란한 그들의 시선에
대적도 대꾸도 하기 싫었다.
결혼 얼마 후
남편과 함께 안동댐과 덕동댐을 둘러보는
그때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안동댐과 덕동댐의 수몰로 남겨진
한을 훌훌 털고
우리의 인생 헤쳐나가자고 다짐했었다.
그날 두 고수의 호수는 유난히 잔잔했고
깨끗했던 것으로 나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이제 그 다짐은 헌신짝이 되고 만 것이다.
비를 피하는 자세로 육중하게 채워진
자물쇠를 이리저리 살피는데 소리가 들렸다.
서울에서 누가 오셨다고요?
하면서 기사와 악수를 나누는 사람이 보였다.
아, 반대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사람
영준 오빠였다.
아니, 이게 누구냐?
명실이 아니냐?
나는 선뜻 나서서 대답하기가 주저되었다.
조금은 개면적은 미소와 함께 내가 말했다.
잘 계셨어요?
영준 오빠
그래, 나야 잘 있었다.
그래, 갑자기 문중 제실엔 웬일이냐?
토구나 혼자서
그냥 한번 다니러 왔어요.
그날 망향정 준공식 때 오빠를 잠깐 뵈었죠?
그때 제실에도 한번 둘러보아야 했었는데
그냥 갔어요.
한번 온다는 게 이렇게 되었어요.
그럼 제실에 한번 들어가 봐야지.
잠깐 있어라.
근처에 제실 관리하는 어른께 가서 열쇠 받아오마.
참, 윤 형은 그만 내려가 보소.
우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까요.
그제서야 몇 번인가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던 기사가
호탕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아이고, 그럼 내려가 보겠습니다.
서울 손님, 잘 다녀가세요.
나를 보며 말하는 그분께 차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었으나
오늘은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오늘 너무 고마웠습니다.
잠시 후 영준 오빠가 열쇠 꾸러미를 들고 왔다.
육중한 자물쇠가 열리고 제실로 들어섰다.
제실은 인적이 끊겼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잘 관리되고 있었다.
한 바퀴를 돌아본 뒤 내가 잠시 묵념의 자세를 잡자
대문 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영준 오빠가 헛기침 소리를 냈다.
내가 다시 제실 건물 전체를 일별하며 돌아서는 신용을 하자.
오빠가 말했다.
다른데 또 볼 일이 있느냐?
이렇게 왔으니 우리 집에 가서 차라도 한 잔 하자.
이렇게 빈손으로 불쑥 찾아가도 되겠어요?
빈손이 무슨 대수래?
저쪽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우리 집이다.
가자.
열쇠 드리고 오마.
오빠와 함께 좁다고는 할 수 없는 산길을 걸었다.
오빠가 받쳐주는 우산을 나는 피하지 않았다.
신발에 충기는 빗방울도 개의치 않았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이런 산 속에서는 뜻밖이라 할 2층 건물이 있었다.
조금 옆엔 유리방 쉼터라고 적힌 간판을 달고 있는
조그만 정자와 유리방 경로당이라는 건물이 마주보고 있었다.
수몰된 명실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는 사람들 동네다.
근처에 영준 오빠네 집과 비슷한 분위기의 집 몇 채가 듬성듬성 있었다.
누가 볼까 하는 조바심으로 쭈뼛쭈뼛하자.
괜찮다.
하며 오빠가 문을 열었다.
나는 누가 더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이곳 저곳을 살폈다.
살림의 흔적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거실이었다.
2층에 가야 편리하다.
올라가자.
2층으로 올랐다.
마치 박물관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창쪽을 제외한 산면을 가득 채운 책이 천정에 닿을만치 빼곡했다.
2층 전체는 서재로 꾸민 공간이었다.
수많은 책과 서예 작품이 빈틈 하나 없이 채워져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던 내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고목 몇 구루 사이로 호수가 보이고
멀리 댐과 댐 기슬그의 정자 망향정이 보였다.
옛집을 헐고 호수와 망향정이 보이는 이곳의 털을 잡은 오빠가 새삼 경외로 다가왔다.
중앙엔 서예 작업을 하는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문외환에 봐도 경지에 이른 서채였다.
내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돌아보자.
오빠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일습을 준비했다.
나는 곧바로 묻고 싶은 걸 참고 참았다.
가족을 묻고 싶었다.
이미 내 심중을 알아내기라도 한 듯이 오빠가 말했다.
남매는 수원과 세종에 살고 있다.
집사람 얘기는 나중에 아마.
나는 묻지 않기로 했다.
오빠의 표정을 보면서는 모를 수 없었다.
보이차를 따르는 오빠의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잡은 차짠도 미세한 떨림을 내게 전하고 있었다.
한참 후 식어가는 차짠을 들고 내가 멍한 표정을 지었는지 영준 오빠가 말했다.
명실아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느냐.
차 한 잔 더 받아라.
화들짝 놀라며 내가 차짠을 내밀었다.
나를 명실로 불러주는 오빠도 옛날 어릴 때를 아직 가슴에 담고 있다는 증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마음 한곳, 풋풋함이 살아나는 듯했다.
그래, 그때 서울로 간 뒤 고향 명실은 별로 찾아오지 못했지?
예, 결혼 얼마 뒤 남편과 함께 안동댐을 다녀올 때 이곳 덕동댐에 한 번 왔었어요.
그리고 10년 전 망향정 중공식 때도 왔었지요.
그래, 그땐 살뜰히 인사도 못했지.
참, 권서방 고향이 안동이라고 들었다만,
이에 시댁도 안동댐 수몰민으로 서울로 이주한 집이었어요.
오빠는 내 얼굴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내가 먼저 말하지 않는 남편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나는 오빠에게 남편의 부재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마음 한구석에 영준오빠를 생각하며 이번에 내려왔다는 말 또한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수몰된 고향을 떠나서 살아온 세월이 내게는 이렇게 비정하지만,
수몰된 고향을 지키며 살아온 영준오빠가 평화로워 보인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가슴 속으로 삼켜야 했다.
묵향이 배인 서재에 스며든 차향기가 내 정신을 정화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인잔을 내려놓지 않는 내게 오빠가 말했다.
그래, 오늘 명실 문중 제실은 무슨 생각으로 오게 되었나?
아무리 출가 외인이지만 고향을, 특히 수몰된 옛 고향을 찾아 옛날을 돌아보고 싶었고,
제실에 들러 조상들께 그동안 못 드린 인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에 찾아와 보았어요.
집에서 매일 내려다 보이는 호수를 바라보는 오빠의 가슴에는 어떤 회안이 남아있을까?
참 좋은 자리에 집을 지었군요. 명실을 오롯이 품고 있으니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시골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한가 찍은 곳이라는 불편함만 없다면 위치는 괜찮지.
어느 해 극심한 감옴때였다.
땜이 거의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물이 빠지자 전국으로 흩어졌던 수몰민들이 모여들었지.
물속에 잠겨있던 골목길, 도랑, 담장, 무너진 초가집, 그리고 감포 가는 길 신장로가 모습이 드러났지.
모여든 사람들 모두 부여잡고 한바탕 울음바다가 펼쳐졌단다.
그때 너희 집 정미소도 희미하나마 형체를 남기고 있었다.
정미소라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미소 형체가 보였다고요?
그럼 보였고 말고.
골짜기 이곳저곳에 모여 살던 삼백여 호의 집들이 모두 보인 건 아니었지만
동네 가장자리에 있던 너희 집 정미소는 위치나 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때 미처 와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해야 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텐데요.
그래도 명실에서 평생 살아온 오빠에겐 마치 보상 같군요.
아침저녁 출퇴근 때마다 마주하는 호수가 생활용수를 담고 있는 그냥 호수가 아니다.
가을이면 호수를 물들이는 토암산의 불타는 단풍이 우리 고향 명실을 지키고 있다고 믿었다.
언젠가 덕동댐이 범람한다는 뉴스가 전국에 넘칠 때는 비가 잦아들기를 기도했었다.
K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한다는 오빠는
매년 펴내는 논문집에 언젠가는 고향 명실을 깊이 있게 다루어볼 생각이라는 말을 했다.
평생 고향을 지켜온 오빠의 눈빛이 고결해 보였다.
내가 양손으로 눈자유를 지그시 누르자 오빠가 말했다.
오늘 거차는 어디 정한 곳이 있느냐?
아니요, 망양정을 한번 둘러보고 곧바로 올라가야죠.
막자 시간을 알고 있어요.
KTX 시간 말이냐?
예, 두 시간 거리더군요.
이렇게 가까운데 그렇게도 멀리 느껴진 고향이었어요.
먼저 망양정에 가보자.
영준 오빠의 차를 타고 덕동댐 관리사무소로 갔다.
일반인들의 출입은 통제되고 있었다.
영준 오빠가 직원에게 이곳 수모올민인데 망양정에 잠깐 다녀오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때 준공식 때는 경황 중이어서 세세하게 보지 못했었다.
전국으로 흩어진 명실 고향 수몰민들이 해마다 망향을 안고 찾아든 덕동댐의 재회를 새기자는 뜻과
시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망양정인 것이다.
팔면을 장식하고 있는 사진들은 그 옛날 우리 동네 모습을 아련하게 담고 있었다.
큰 마을 물레방아, 시래골 담배집, 새술막 덕동상회, 새마을 구판장, 덕동초등학교 교사, 덕동출장소, 덕동지서, 고선사지,
새마을 사업으로 단장된 명실마을, 그리고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내린 덕동명곡마을 표창장까지 모두 가슴으로 파고드는 모습이다.
망양정으로 오르는 길가에 세워진 세 편의 시중 한 편이 유독 내 눈을 붙들었다.
덕동호 30년
고향이 그리워 망양정 세웠는데 오가는 이 없고 모란 개만 흐르네
모닝글로리 단지 속에서 흰 연기 피어오르면 외로운 정자엔 찬 기운만 돌고
지나간 어린 시절 소급친구 생각 물레방아간 철없이 뛰어놀던 운동장엔 물고기만 논일고
명절이라 이동영화관 숙아 자야 같이 가 동마버스 기적소리와 뜀박질에 휴 숨이 막혀
사방이 산이고 물인데 누가 살았지 물 건너 언덕엔 이쁜 집만 한두 채
물 속 집에는 옛 친구 그림자뿐이고 산천에는 시로태풍 카눈 잔해물만 아종 아종
세 편의 시를 몇 번이고 읽던 내가 눈자위를 훔치자 영준오빠가 명실마을 쪽을 향해 돌아섰다
호수는 잠시 고요해졌다 오늘 뜬금없는 귀향에서 오빠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쉬움을 남길 뻔했다
가게를 승현이와 승희에게 맡기고 내려와 있을 만한 곳이 있을까 살피로 내려온 내가
금년간 한 번 더 내려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간포 가는 길 산모퉁이 호수 아래 토암산의 산자락이
조용히 물 속에 잠긴 채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서울 가는 ktx 막차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승현이에게 서울역 도착 시간을 문자로 보냈다 우리들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일까요
어떤 의미이길래 고향을 다시 찾고 싶어지는 걸까요 마치 먼 태평양 바다에 나갔던 연어가
자기가 태어난 그 이름도 알 수 없는 그 작은 지천까지 찾아오듯이 말입니다
오늘 제가 읽어드린 작품의 제목이 회향입니다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의미인데요
이 소설 속 주인공인 윤희는 어느 정도 삶의 기반을 다 이루어 놓은 이후에 남은 삶을 고향에서 살기 위해
준비차 고향을 방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향은 이미 수십 년 전에 땜 때문에 수몰이 된 상태이고요
그래서 어찌 보면 윤희에겐 고향이 없어진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긴 고향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일단 좁은 의미로서의 고향, 즉 자기가 낳고 자란 그 동네는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걸 윤희가 모를 리 없겠죠 하지만 그녀가 그곳을 찾은 것은 고향의 또 다른 의미를 찾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것은 윤희에게 고향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기억 속의 인물인 박영준 때문입니다
물리적인 고향인 집과 그 거리는 수몰되어서 가볼 수 없지만 고향 근처에서 지금도 고향을 지키고 있는 박영준은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윤희에게 박영준은 영준오빠, 즉 어릴 적 짝사랑의 대상이라는 의미와 함께 정신적으로는 고향을 여전히 품고 있는 존재로서 고향을 가장 잘 느끼게 해주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윤희가 고향을 찾는다는 것은 영준오빠를 다시 만난다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영준오빠와 제외하는 것이 주요 목적은 아니겠지만 고향을 다시 올 결심을 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귀소 본능과 더불어
박영준이라는 사람이 거기에 그대로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보게 됩니다
만약에 남편이 사고로 죽지 않았다면 아마도 서울에 그대로 살고 있었을 텐데요
고향을 그리워 하긴 하겠지만 다시 돌아와서 살 생각은 안 들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요 하지만 이것이 인연이었기 때문인지 두 사람은 그들의 고향에서 다시 제외를 하게 되었습니다
인연이었으니까 그랬겠죠 저는 이 작품을 읽어 가면서
고향이라는 것은 꼭 어떤 장소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고향은 누군가 그리운 사람일 수도 있겠고 그리움이 생각나게 하는 냄새도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또 고향이 생각나게 하는 맛일 수도 있겠죠
그 예전에 그 광고에 보면 탤런트 누가 나와서 그래 이 맛이야
그 바로 뒤에 고향의 맛 뭐 이런 조미료 광고가 있었죠
그 광고가 생각이 나네요 그것처럼 맛도 냄새도 또는 그리운 누군가도 고향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말이죠 저희 고향을 떠올리면 고향 집앞의 언덕이 생각납니다
제가 아주 어릴 적 저희 집은 야트막한 산의 중턱에 있었는데 아버지가 집앞의 마당에 꽃들과 여러가지 채소를 키우셨어요
그리고 그 마당을 나오면 완만한 경사가 진 언덕의 내리막길이었거든요
거길 친구들과 내리 달리면서 넘어지고 그리고 울면서 해질녘까지 놀던 기억이 제가 가진 고향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이 기억에 고향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하네요
지금까지 이인록 작가의 회향을 읽어드렸습니다
다음에도 재미있는 작품으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드리면서 그때까지 행복하고 즐거운 날들 보내세요
one two three counting as i think of you even when this night passes when tomorrow comes
my prayers will continue
the morning stars i love you and tomorro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