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떠나 보내고, 아내를 추억하다 세상에 알 수 없는 것이 인연이라더니 [인연의 새로운 마디] 이연숙 #책읽어주는남자 #오디오북 #책과함께하는하루단잠

책과 함께하는 하루 단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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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인트로
00:02:47 본문낭독
00:49:32 단잠의 아주 주관적인 감상평
00:50:50 클로징 음악 "나의 별이 된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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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읽어보지 않은 금방 나온 따끈한 책을 읽는 기법은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서점에 갔을 때 바로 오늘 출간된 새 책이 진열되어 있다면 저는 일단 사고 보겠습니다.
아 물론 제가 관심이 있는 분야의 책이어야 하겠죠?
관심도 없거나 제가 한쪽 읽기에도 벅찬 수학이론에 관한 책이거나
사회정치이론에 관한 책은 아니어야겠죠?
일단 제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 분야나 수필이 진열된 곳에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비닐도 뜯지 않은 상태로 발견된다면
이건 정말 흥분되는 일입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손에 들고 겉표지를 읽어보고는 바로
망설임 없이 계산대로 가서 계산을 하고 나올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얼른 버스에 올라타고 제일 뒤에 있는 가로로 긴 의자에 앉아서 비닐을 조심스레 벗겨내고는 첫 페이지를 설레는 마음으로 읽어볼 거예요.
그러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길은 그 어느 때의 여행보다도 더 멋진 여정이 될 것입니다.
우리 채널에 오시는 분들은 모두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니까 저처럼 이런 멋진 여행을 이미 해보셨겠지요?
오늘 읽어드릴 작품은 오랜만에 현대 소설입니다. 아주 멋진 작품이죠.
이현숙 작가님의 인연의 새로운 마디라는 작품입니다.
오늘 읽어드리는 작품은 이현숙 작가가 2021년 1월에 출간한 인연의 새로운 마디라는 소설집 속에 있는 작품입니다.
작품집 속에는 마음을 흘리는 여러 작품들이 있는데요. 저는 그 중에서도 작품집의 제목과 같은 이름의 소설이 특별히 마음에 더 와닿더군요.
사별한 아내와 얽혀있던 추억을 따라가며 애틋한 애도의 과정을 거치는 남편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아내를 향한 남편이 애틋하고도 따뜻했던 마음의 추억 여정으로 같이 따라가 볼까요?
낭독을 시작하겠습니다. 낭독 끝까지 저와 함께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인연의 새로운 마디. 이현숙. 두 딸과 사위가 잠시 쉬러 병원 근처의 큰 딸 아파트에 가고
기주는 홀로 남아 서희의 병상을 지키다가 잠시 졸고 있는데 요양보호사가 소리쳤다.
사모님이 숨을 안 쉬는 것 같아요. 벌떡 일어나 손을 코에 대니 숨결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심전도 그래프는 아직도 완만한 곡선을 느릿하게 그리고 있었다.
요양보호사는 급하게 간호사를 부르러 갔고 기주는 큰 딸에게 전화했다. 간호사가 와서 호흡을 확인하더니
꺼지지 않는 심전도 그래프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얼마 전에도 어떤 환자가 호흡이 멈춘 후에도 심전도 그래프가 움직였는데
미국에 있던 아들이 오자 끝나더라고요. 그 환자가 평소 가장 보고 싶어했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정말 신기했어요.
아마 사모님도 따님들 가족 보고 싶어서 아직 못 떠나고 계시나 봐요.
두 딸과 사위가 곧바로 달려왔다. 딸들 가족이 모두 와서 조금 지나니 심전도 그래프의 곡선이 직선으로 변했다.
그렇지만 아직도 따뜻한 서희의 손발을 기주는 정신나간 듯이 주물렀다.
황망한 채 서 있던 딸들은 병상에 자는 듯이 누워있는 서희의 몸을 얼어만지면서 일제히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의사가 와서 서희 사망을 확인하는 선고를 했다. 본능적으로 시계를 보니 밤 11시 정각이었다.
평소 신세지기를 싫어하는 서희가 하루라도 장례기간을 단축시켜 남은 가족의 힘을 덜어주려고 이런 절묘한 시간에 운명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밖에는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며 창문에 무수한 물방울을 만들고 있었다.
봄비가 내리는 적막한 한밤 중에 기주는 서희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헤어짐 의식을 두 딸들과 함께 치르고 있었다.
잠자듯 평화롭게 누워있는 서희를 바라보며 이 세상의 서희 없는 삶을 생각하니 기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허탈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마음 놓고 실컷 울 수도 없었다. 모두 기준만 쳐다보고 있었기에.
기준과 서희는 23살에 만나 26살에 결혼하고 63살에 헤어졌다.
서희는 기준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든든히 지켜주는 버팀목이었다.
서로 다른 성격으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기준에게 사랑을 알게 했고 인생의 친구이자 아내로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항상 기준 옆에 있었다.
서희가 세상을 떠나자 기준은 신을 버리고 싶을 만큼 원망스럽고 화가 났다.
왜 자신이 곁에서 그렇게 빨리 데리고 갔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서희는 폐암으로 1년여 동안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다.
암선고를 받은 서희는 의연했고 현대의술을 믿지 않았다.
주변에서 암수술을 하고도 재발하여 죽는 모습을 보며 병원에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인생의 마지막을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으며 보내는 것이 싫다고 했다.
두 딸과 사위가 나서서 장래의 딸은 여러 일들을 맡아 처리했다.
장래식장은 서희가 입원했던 병원의 영안실에 마련했다.
촛불이 곱게 타는 것을 보니 엄마는 좋은 데 가셨을 거예요.
장래식장 재단 위에서 타고 있는 촛불을 하염없이 보고 있던 큰딸이 말했다.
서희의 고등학교 친구들이 제일 먼저 문상 왔다.
그 중에는 어릴 적부터 서희와 같은 동네 살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쭉 단짝이었던 친구 영미가 있었다.
서희가 평소 영미 얘기를 많이 하며 함께 여행가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도 하고
집에 놀러 온 영미와 마주친 적도 있어 낯이 익었다.
그런데 기주는 차마 영미와 다른 친구들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친구들을 보니 그들과 같이 까르르 웃으며 수다를 떨었을 서희 모습이 포개지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앞을 가렸기 때문이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다 닦고 간신히 진정하고 있으려니
영미가 다가오며 같이 온 친구들에게 인사시켰다.
서희 친구들은 모두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기주는 와주어 고맙다는 인사만 짧게 했다.
문상을 마치고 나가는 친구들을 따라가던 영미가 잠시 뒤돌아 서다니 기준에게 다가와 말했다.
얼마나 슬프고 막막하세요.
무어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서희가 지난번 동창 모임에 나왔을 때도 괜찮은 것 같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황망하게 갈 줄 몰랐어요.
서희 없는 빈자리를 어떻게 해요.
따님들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에요.
기주는 백내장 수술을 하면서 시력교정 수술도 받아 평소에는 안경을 잘 쓰지 않았다.
그러나 장례식 내내 안 쓰던 안경을 걸치고 있었다.
안경 쓴 모습이 눈이 작은 기준 얼굴이 단점을 가려주고 지적으로 보인다며
이미지 관리용으로 서희가 쓰라고 했기 때문이다.
기주는 서희가 좋아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서희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하지 말고 양지바른 곳에 묻어달라고 했다.
건설회사 다니던 기준이 중동건설붐이 한창일 때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두 딸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기준 어머니의 성화에 뒤늦게 얻은 막내 아들이 두 살이었다.
전기압선으로 집에 불이 나 아들과 함께 질식한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서희만 간신히 의식을 회복했고 아들은 깨어나지 못했다.
서희는 하나밖에 없었던 아들 잃은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았고
불에 대한 트라우마는 공포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서희는 절대로 화장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비록 죽었다 할지라도 그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자신이 타들어가서
제만 남는다는 것이 너무 두려웠을 것이다.
기준은 서희가 암투병하는 동안 틈틈이 공원묘지를 알아보았으나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서희가 몇 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영미 남편이 묻힌 공원묘지를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집에서 그리 멀지도 않고 풍수지리 상으로도 좋은 곳이라고 들었다면서
그곳에 한번 가보자고 했다.
죽어서도 영미가 보고 싶을 텐데 남편 성묘 올 때 자신한테도 찾아오지 않겠냐
기준은 서희와 같이 공원묘지를 둘러보았다.
산으로 둘러싸인 공원묘지가 아늑하고 왠지 편안해 보였다.
기준도 마음에 들어 인공연못이 내려다 보이고 볕이 잘 드는 남향바지 합장묘지를 구입했다.
발인날 영미는 일찍 와서 발인에 참석한 후 공원묘지까지 동행했다.
서희의 관이 묘지에 안치되는 의식을 치를 때 영미도 삽을 들어 흙을 퍼뿌려주고 꽃을 넣어주며 흐느껴 울었다.
안치가 끝나자 묘지 주변을 둘러싼 조문객들이 돌아가고 있었는데
어둡고 습한 깊은 땅 속에 서희를 두고 떠나야 하는 기준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기준은 충 늘어진 어깨를 하고 을씨년스러운 세월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고
잔디 없이 임시로 흙으로 덮여진 헐벗은 봉분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뗐다.
장례식과 사무제 동안 북적이던 문상객과 두 딸이 돌아간 후
홀로 남겨진 기준은 비로소 서희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서희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여보 배고프지 내가 얼른 저녁 차려 줄게 잠시만 기다리세요
하며 늦게 귀가한 미안함을 애교로 때우며 서희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았다.
서희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만 해도 그렇게 빨리 이 세상과 하직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현대의술이 이토록 발달했는데 어떻게든 암을 치료하고 기준의 곁을 지키며
코맹맹이 소리로 아양도 떨고 투정도 하고 바가지도 긁고 하면서 언제까지 살아 있을 줄 알았다.
인생에서 많은 일들이 미쳐 준비되지 않은 채 진행된다는 사실이 기준을 무력하게 했다.
가슴 한구석이 시리게 아파오는 것을 느낀 기준은
당신이 내 아내라서 행복했어.
이제까지 곁에 있어 주어 고마웠어.
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서희에 대한 상념이 몸을 움직이게 한 듯
거실에 앉아있던 기준은 벌떡 일어나 서희가 썼던 방의 문을 밀쳤다.
서희가 통증으로 뒤척이면 기준이 잠을 풍 못 잘 것이라고 하며 방을 따로 쓰자고 했다.
서희가 병이 위독해져 병원으로 가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있었던 방으로 들어서자
기준이 허탈한 마음으로 서희의 추억들이 성큼 들어왔다.
서희가 집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싱글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둘째 딸이 결혼 전까지 쓰던 침대였다.
침대 헤드 부분에 수납공간이 있는데 서희는 그곳에 미니 컴포넌트를 놓아두고
CD로 음악을 듣거나 라디오를 들었다.
잠들기 전 읽던 책도 놓아두고 차고 있던 손목시계도 풀어놓는 장소였다.
방에는 기준이 옷가지를 넣어두는 서랍장이 있는데
그 서랍장 아래 바닥에 검은색 비닐봉투가 있었다.
비닐봉투는 입구가 덜 묶여진 채로 있었는데 찢겨진 사진들로 가득했다.
기준은 그것을 보자.
아 서희가 위독해져 급하게 병원으로 가는 바람에 태우지 못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사진을 찢었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서희는 죽기 얼마 전 그동안 찍었던 사진을 모두 없애자고 했는데 기준은 반대했다.
서희가 죽게 되면 쓸모없이 서랍만 차지하고 있을 것 같은 사진이었지만
현실적 쓸모유무가 이를 없애는 절대 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희는 자신이 죽은 후 기준 혼자 자신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승을 편하게 떠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사진을 찢으면서 평생 함께해온 추억도 버려야만
이에 발목 잡혀 구천을 맴돌지 않을 것 같다며 쓸쓸하게 서희가 말했다.
그러더니 분연히 일어나 망설이는 기준 앞으로 사진을 모아둔 상자를 가져와 엎어놓고
널브러져 있는 사진을 찢기 시작했다.
기준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잘 안 찢어지는 사진을 힘들게 찢는 서희를 보다 못해
같이 앉아 사진을 찢었다.
죽음을 앞둔 서희는 사진을 찢으면서 생의 추억을 지워나가는 것 같았다.
사진 속 얼굴이 잘려나가는 것을 보면서 기준은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검은 비닐봉투를 들어올리니 미처 다 찢어지지 않은 사진 몇 장이 떨어졌다.
그 중에서 한쪽 귀퉁이가 조금 잘려나간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검붉은 새벽 하늘에 막 떠오른 찬란한 불덩이 같은 해가
서희의 오른손과 기준의 왼손을 합쳐 만든 하트 모양 안에 담겨져 있고
주변의 소나무는 검은 실루엣으로 찍혀져 있었다.
서희는 환갑되는 해의 1월 끝자락에 드라마 모래시계의 촬영장소이고
바닷가에 있는 정동진역에서 해뜨는 모습이 보고 싶다고 했다.
모래시계는 6.25 이후 최대 격동기였던 7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개성 있는 인물들의 얘기를 역동적으로 그린 드라마다.
이 드라마가 시작되면 서희는 손에 tv 리모컨을 꼭 쥐고 채널을 돌리지 못하게 해
다른 채널 프로그램은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기준도 이 드라마를 볼 수밖에 없었는데
나중에는 이 드라마를 보기 위해 일찍 귀가까지 서둘렀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귀가시계라는 별칭이 붙여졌다고도 하고
당시 방영하는 시간대엔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었다고도 했다.
기준은 새해 첫날도 아닌 시점에 해뜨는 모습이 보고 싶다는 서희의 제안이 다소 엉뚱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서희는 환갑을 맞이해 일출을 보면서 인생 후반을 위한 기원을 하고 싶다고 했다.
서희와 동갑인 기준은 서희보다 생일이 빨라 1월 초에 환갑을 맞이했지만
별다른 느낌 없이 두 딸내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지냈다.
하지만 서희는 특별한 이벤트 없이 환갑을 지내는 것이 좀 섭섭했나 보았다.
서희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 같아.
흔쾌히 주차장으로 내려가 세워둔 차에 시동을 건 후 깜깜한 고속도로를 달렸다.
기준은 달리는 차 안에서 서희에게 물었다.
정동진 역은 왜 하필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까?
정동진이라는 내 친구가 있어서 그런지 지명이라기보다는 꼭 사람 이름인 것 같아서 말이야.
광화문에서 정동쪽에 있다는 뜻이라고 해.
그런데 어떤 사람이 포털사이트의 지도를 축소해 광화문에서 수평선을 그려보았는데
광화문 정동쪽은 정동진이 아니라 그 아래쪽 옥계 근처라 하더라고.
쉬지 않고 고속도로를 달려와 정동진 역에 도착하니 동쪽 하늘이 조금씩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붉게 달아오른 해가 떠올랐다.
그 순간 서희와 기준은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해를 감싸고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에게 사진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 사람이 카메라의 앵글을 아주 잘 잡아 명장면을 찍은 것이었다.
사진을 찍은 후 서희는 두 손을 합장하며 무어라 소망을 비는 것 같았다.
기준은 무슨 소원을 그리 진지하게 기원했느냐고 서희에게 물었다.
환갑을 넘은 인생 후반에는 무엇보다 건강이 제일 중요하잖아.
근데 나만 건강하면 뭐해? 당신도 건강해야 되잖아.
그래서 둘의 건강을 제일 먼저 기원했어.
오래 살기는 크게 바라지 않지만 죽는 날까지 다른 사람한테 도움받지 않고 살아갈 정도로 건강해야 되잖아.
맞아. 둘 다 건강해야 되고 말고.
나도 이제 퇴직했으니 건강을 위해 우선 당신과 같이 할 수 있는 운동을 좀 찾아봐야겠네.
또 무엇을 기원했어?
그랬더니 서희는 달이 떨리기 전에 기준과 해외여행을 같이 가고
어릴 때 배우다만 피아노를 계속 배우고 기준과 싸우지 않고 잘 지내게 해달라고 했다고 속삭이듯 말했다.
인생 후반의 계획을 품은 해는 점점 솟아 구름 위로 올라갔다.
정동진역 철로 건너에는 모래식의 소나무가 허리가 구부러진 채로 세월을 지고 있었다.
이 소나무를 보자 서희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모래식의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모래식의 드라마에서 수배 중이던 윤혜린이 운동권 신부님이 탈로나 쫓겨 이 역 소나무 앞에서 애타게 기차를 기다렸잖아.
그때 그 심정이 얼마나 초조했겠어?
그러다가 애석하게 혜린은 체포되고 기차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서서히 떠나고 혜린은 원망스럽게 기차를 바라보고
기준은 서희의 얘기를 들으니 그 장면이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 같았다.
서희는 소나무 얘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애초에 이 소나무 이름이 고현정 소나무였다고 해.
하지만 그녀가 결혼한 이후 모래식의 소나무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던데 혹시 그 사이 고현정은 다시 왔다 갔을까?
아니면 그녀도 찾지 않는 소나무를 우리만 밤새 달려와 소망을 빌며 행복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당시 서희가 품었던 소망은 환갑 다음 해에 발견한 암 때문에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준은 한치 앞을 못 내다보는 인간의 목매함을 생각하니 씁쓸했다.
그러나 서희와 함께 정동진 역의 모래식의 소나무에 기대어 붉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던 그 시간은 이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리움이 되었다.
기준은 한 장의 사진이 말해주는 추억에 잠겨있다가 침대에 걸터앉아 헤드 부분 수납장으로 눈을 돌리니 책이 한권 놓여있었다.
그 책은 프랑스 작가 생택 쥬페리가 쓰고 그림도 그려나온 어린 왕자였다.
책 표지를 들춰보니 서희야 43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어린 왕자 책이 새로 출판되었네.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읽어보길. 서로에게 오랜 세월 길들여진 사랑하는 친구 영미가 라는 단아한 글씨가 보였다.
불문과 출신인 서희가 가장 좋아했던 책을 가장 친한 친구인 영미가 생일선물로 준 것이다.
서희가 위독해져 병원 응급실에 가기 전까지 틈나는 대로 이 책을 가까이 두고 읽은 것 같았다.
그동안 세월이 흐르고 이사를 다니면서도 이 책은 꼭 챙겨간 것 같다.
책 표지가 달아 낡아있었고 종이도 약간 변색되어있었다.
책장을 넘기다보니 어린 왕자 모형을 사이에 두고 영미와 함께 찍은 사진이 끼어있었다.
서희가 어린 왕자를 만나고 싶다고 해 기중과도 같이 간 적이 있었던 가평의 뿌띠 프랑스 마을에서 찍은 것 같았다.
뿌띠 프랑스는 프랑스 마을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그저 이국적인 풍경에만 그칠 수 있는 건물들이 어린 왕자로 인해 생명을 얻었다.
뿌띠 프랑스 건물 곳곳에 어린 왕자의 얘기들이 숨어있다.
기준은 서희가 어린 왕자 책을 자주 가까이 하는 것을 보며
무엇이 좋아 그렇게 반복해서 읽는지 모르겠네.
나는 한 번 책을 보고 나면 다 아는 내용이라 다시 읽기 싫은데 라고 말하자.
시간 날 때 한번 읽어보면 내가 읽고 또 읽는 이유를 알 거야 라고 말하며 간단하게 책의 줄거리를 말해주었다.
코끼리를 잡아먹은 보아뱀의 그림을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아
화가의 꿈을 포기한 사람이 나중에 비행기 조종사가 되었어.
불시착하게 된 사하라 사막에서 이상한 소년을 만났는데
그 소년은 그가 어릴 때 그렸던 코끼리를 잡아먹은 보아뱀 그림을 한 번에 알아보았다고 해.
그 소년은 애인인 장미꽃을 자신이 사는 별에 남겨두고 여행길에 오른 왕자로서
어린 왕자는 지구로와 뱀, 여우, 조종사와 친구가 됐어.
외로운 왕자에게 한 마리의 여우가 나타나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다른 존재를 길들여 인연을 맺어두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쳤어.
왕자는 이 세계 속에서 자기가 책임을 져야만 하는 장미꽃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깊은 뜻이 있음을 깨닫고 자신이 살았던 별로 돌아갈 결심을 해.
예전의 어린아이인 어른에게 바친다.
라는 작가의 말처럼 어른이 된 사람도 이 동화를 읽으면
금세 어린 동심으로 돌아가 위로받고 꿈을 꾸고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는 것 같아.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세상에 어린 왕자 같은 존재가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진정으로 하게 되거든.
나는 결코 어린 왕자가 될 수 없지만
그런 사람 하나쯤 존재해야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돼.
그런 얘기였구나.
시간 날 때 꼭 한번 읽어봐야겠네.
그러나 기준은 이제까지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약속을 못 지켜 서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책장을 넘기다 보니
서희가 밑줄 쳐놓은 문장들이 보였다.
아마 서희가 좋아하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장이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기준은 서희의 감성을 느끼며 줄친 문장들을 꼼꼼하게 읽어나갔다.
만약 누군가 수백만 수천만 개나 되는 별들 중
어느 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꽃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그 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행복해질 수 있는 거야.
나도 너에게는 수없이 많은 여우들과 조금 더 다를 바 없는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지.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는 거야.
너는 내게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야.
그럼 비밀을 가르쳐 줄게.
아주 간단한 거야.
오직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내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하게 된 것은 내가 내 장미꽃을 위해서 들인 시간 때문이야.
하지만 넌 그걸 잊으면 안 돼.
내가 길들인 것에 대해 너는 영원히 책임이 있는 거야.
너는 내 장미꽃에 대해 책임이 있어.
줄 쳐놓은 문장을 읽어가며 서희는 어떤 마음으로 이런 문장에 줄을 쳐놓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언론 보기에 어린이를 위한 단순하고 순진한 한 편의 동화에 불과한 것 같지만
가족, 친구, 연인 등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할지
혹은 이런 관계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놀랍도록
본질적인 답과 지혜를 주고 있는 듯했다.
책 안 표지에 영미가 적은 서로에게 오랜 세월 길들여진 사랑하는 친구 영미가
라는 글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40년 동안 나와 서희도 서로에게 길들여졌고 그래서 서로에게 책임이 있는 거야.
이 낡은 책이 더 없이 소중한 것은 서희가 아꼈던 책이기 때문이겠지
기준은 책의 첫 페이지부터 한 문장 한 문장 뜻을 새겨가며 읽어 나갔다.
한참 책을 읽어가던 기준이 눈이 피곤해져 잠시 쉬려고 베개를 끌어당기니
CD 케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리스트, 디비시, 플랑크, 사티의 피아노 곡들을 연주한 음반의 케이스였다.
케이스가 비어있는 것을 보니 미니 콤포넌트의 CD 플레이어의 음반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기준이 CD 플레이어를 켜니 리스트의 사랑의 꿈이 흘러나왔다.
기준은 클래식 음악에 관심도 없고 거의 듣지 않았지만
이 곡은 서희와 함께 평생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음악 중의 하나다.
감미롭게 다가와 상처난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듯하다가
강렬하게 서정을 표현하는 압도적인 피아노 연주가 기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치 살아있는 기준이 세상을 하직한 서희와 음악을 통하여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서희는 초인적인 피아노 연주 솜씨를 가졌다고 전해지는 연주가 겸 작곡가였던 리스트를 특히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리스트 탄생 200주년을 맞아
리스트 작품만으로 백건우가 공연한다는 소식을 접한 서희는 가장 비싼 알석 티켓을 구매했다.
평소 절약하는 서희가 어떻게 그런 거액을 선뜻 들여 티켓을 샀는지 기준은 이해가 되지 않아 투덜거리며 공연장에 따라가섰다.
기준은 서희와 같은 대학교에 다녔다.
3학년 때 산정호수로 놀러가는 학과 단체 미팅에서 기준의 파트너가 서희였다.
토목공학과에 다니던 기준은 군대를 다녀온 후 복학했고 서희는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해 등록금을 모으느라고 좀 늦게 불문과에 입학했다.
기준은 복학한 지 얼마 안 되어 후배들과 어울리는 것이 좀 어색했고 서희도 동급생들보다 나이가 좀 많아 학교에서 다소 걷도는 처지였다.
둘은 나이도 동갑이고 학과 내에서의 처지가 비슷해 처음부터 말이 잘 통해 미팅 후 계속 만났다.
첫 데이트를 무교동의 고전음악 감상실에서 했는데 그날 서희가 신청해 들려준 곡이 리스트의 사랑의 꿈이었다.
서희는 클래식 음악 중 특히 피아노 연주곡을 좋아했다.
중학교 때 아버지의 빚 보증으로 생활이 어려워져 피아노를 배울 수 없게 되어 피아노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아있어 그렇다고 했다.
신청곡이 끝날 무렵 서희는 음악가 리스트와 그가 작곡한 사랑의 꿈 얘기를 들려주었다.
리스트는 키도 크고 금발로 눈길을 끄는 외모와 신들린 피아노 연주로 유명했다고 해.
리스트 아버지가 어린 리스트를 데리고 베토벤의 제자였던 체르니를 찾아갔었대.
처음에 리스트를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던 체르니는 건반 위를 춤추듯 뛰어다니는 리스트의 화려한 연주 기교에 입을 다물지 못했나봐.
체르니는 리스트의 손을 잡고 이 아이에게 내가 피아노를 가르칠 수 있는 영광을 주겠소?
레슨비는 받지 않을 테니 내게 보내시오 라고 했대.
내가 만약 리스트만큼 재능이 있었고 이를 알아봐주는 스승이 있었다면 우리 집이 어려워져 레슨비를 낼 수 없었어도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을 텐데.
리스트가 그럴 정도로 천재였구나.
그런데 윤서희가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재능을 알아보는 스승을 못 만난 거겠지.
기준의 농담 섞인 위로의 말을 들은 서희는 빙긋이 웃으며 얘기를 계속했다.
리스트는 음악 가사상 최초로 대중의 우상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오늘날로 말하면 아이돌 스타였던 거지.
공연장마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연주가 끝나면 괴성을 지리다 못해 기절하는 여인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랬어? 서희 너도 그 당시 살았다면 아마 리스트의 왕팬이었을 거야.
그런데 사랑의 꿈은 어떻게 작곡된 거야?
리스트는 첫사랑인 마리 다구백작 부인과 헤어진 후
두 번째 운명의 여인인 비트켄슈타인 공작부인을 만났는데
바로 그 무렵 세 곡의 가곡을 썼다고 해.
독일 시인 프라일리그라트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인데
리스트는 3년 뒤 피아노 독주용으로 편곡해
세계의 녹턴이란 제목을 붙였어.
특히 그 중에서 세 번째 곡이 바로 사랑의 꿈이야.
근데 원래 제목은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라고 해.
이 제목을 보면 리스트가 공작부인에게 느꼈던 달달한 로맨틱한 감정이 넘치는 것 같지 않아?
클래식의 거의 무지한 기준은 리스트와 곡에 대한 전문가 수준의 얘기를 하고 있는 서희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그 후 기준도 이 음악을 귀담아 들으며 익혀 멜로디를 흥얼거릴 정도였다.
기준은 이 음악이 서희에 대한 추억을 넘어 남은 인생의 소중한 동반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치 서희를 처음 만났던 아득히 먼 과거에서부터 서희가 떠나고 없는 지금
그리고 앞으로 남은 생을 연결해주는 고리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니 콤포넌트 옆에 은빛을 띈 서희의 론진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론진은 거의 300년 전부터 시계를 만들어 온 스위스 시계 산업의 산증인이라고 할 만한 브랜드이다.
클래식하고 심플한 모양을 가진 고급 시계임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비교적 합리적이어 기준이 서희에게 선뜻 사주었던 시계였다.
서희가 출근하는 기준에게
라고 해서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니 현관 밖까지 서희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기준이 놀라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장모님이 난처한 기색으로 소리치며 울고 있는 서희를 달래고 있는 중이었다.
서희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보증을 써준 친구가 사업이 망해 아버지의 월급까지 자압당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서희는 수업료도 제때 못 내어 종례시간마다 이름이 불러지는 일이 자주 있었다.
집안이 어려워지자 서희 어머니는 집안살림에 보태느라고 시장 한구석에서 생선을 팔았다.
서희는 어머니 혼자 생선 파는 것이 안쓰러워 학교가 끝난 후 창피한 것도 무릅쓰고 곁에 같이 있어주었다.
그런 서희를 대견하게 생각한 어머니는 장사 마친 후 집으로 오면서 10원짜리 동전 몇 개를 서희 손에 쥐어주었다.
서희는 학교 등교 때는 버스를 타고 가고 학교 때는 30여 분 넘게 걸어오면서 돈을 모아 매점에서 라면, 빵 등을 사먹고 친구들한테도 사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같은 반이었던 영미가 시계를 잃어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그 당시 시계는 고가의 물건이었는데 집안 형편이 넉넉했던 영미는 시계를 차고 다녔던 몇몇 안 되는 학생 중 하나였다.
그날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이 반 학생들 모두 눈을 감게 한 후
지금이라도 영미 시계를 선생님한테 가져다 주면 나만 아는 비밀로 하고 일체의 잘못을 묻지 않을 거야? 라고 했다.
그러나 끝내 시계는 찾지 못했다.
서희는 거기까지 기억하고 있었는데 장모님이 오신 그날 그 이후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서희야, 너 중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 기억나니?
어느 날 그 담임선생님이 나에게 연락해 좀 보자고 했어.
그동안 경황이 없어 담임선생님한테 인사도 못 드리고 해서
부랴 사랴 집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꽃을 사들고 학교에 갔어.
담임선생님이 이것저것 가정사정을 물어본 끝에
며칠 전에 서희 친구 영미가 시계를 잃어버렸는데 아직 찾지 못했어요.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스러운데 혹시 서희가 시계를 가져간 것 아닐까 해서 어머니를 뵙자고 했어요.
서희가 영미와 매일 붙어 다닐 정도로 친한데
좋은 시계를 차고 다니는 영미를 부러워하는 마음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 같았어요.
또 반 학생들 얘기를 들으니 서희가 수업료도 제때 못 내는데
자주 매점에 들려 군것질을 하고 가끔 친구들도 사준다고 하더군요.
어머니가 잘 타일러, 서희에게 시계를 저한테 가져오라고 하시면 안 될까요?
그러면 저는 없었던 일로 하겠어요.
라고 하시더라.
아니, 엄마는 그런 얘기를 왜 지금 하는 거야?
정말 말도 안 돼. 난 억울해.
엄마는 아직도 나를 의심해 이런 말을 하는 거야?
그 선생님 어디 계시는지 알면 당장 가서 따지고 싶어.
서희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나도 내가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당시 너한테 얘기하지 않았던 거야.
나도 너무 분해. 그날 사간 꽃도 쓰레기통에 버리고 왔어.
너는 정직해서 엄마한테 한 번도 거짓말 한 적 없고
동생 물건조차도 전혀 손대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왔어.
그렇지만 너를 의심하는 그 여선생님이 몹시 원망스러웠어.
너한테 그 얘기를 하면 내가 상처를 받을 것 같아서.
서희가 그랬으면 그 당시 얘기해 주었어야지
왜 새삼스럽게 지금 얘기해서 훔치지 않은 것을 증명할 수도 없게 만들어요?
하며 장모님한테 소리치며 펑펑 울었다.
그 얘기를 들은 기준은 마치 서희가 된 듯 억울함이 목까지 차올라서 말했다.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어떻게 확실한 증거도 없이
짐작만 가지고 자기 학생을 도둑으로 몰 수 있나?
교육자 자격이 정말 없네.
우리 같이 그 선생님 찾아서 조곤조곤 따져보자.
다음날 기준은 서희의 억울한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 싶은 마음에
평소 서희가 갖고 싶어했던 론진 시계를 사주었다.
론진 시계를 손목에 차면서 서희는 전날의 울분이 좀 가라앉기는 했지만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그 여선생을 어떻게 찾지?
라며 분한 표정을 짓곤 했다.
흠집 하나 없이 잘 관리되어 있는 서희의 론진 시계를 보며
이제라도 어린 제자에게 도둑 누명을 씌운 선생님을 찾아내어
윤서희는 그때 절대로 시계를 훔치지 않았단 말이에요?
하며 대들고 싶어졌다.
그래야 서희도 편한 마음으로 저 세상에서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침대 맞은편에 4단짜리 서랍장이 있는데
위칸에는 기준의 속옷과 양말, 손수건 등을
아래칸에는 티셔스나 바지 등을 넣어두었다.
서랍장의 위쪽 속옷 넣어두는 서랍이 조금 열려져 있고
거기에는 새로 사서 빨아둔 기준의 트렁크와 러닝셔스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서희가 위독해져 병원에 입원하기 며칠 전
서희는 기준과 같이 아파트 맞은편에 있는 제레 시장에 같이 가자고 했다.
장보온 물건들을 서희 혼자 들고 오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
기준도 따라 나섰다.
서희는 시장에 들어서더니
곧장 속옷 파는 가게로 가서 기준의 팔을 잡고 들어갔다.
푸근하게 생긴 중년 아주머니가 서희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늘은 우리 남편과 같이 왔어요.
남편 속옷 좀 사려고요.
주인 여자가 남성 속옷을 가져와 펼쳐 보여주는 사이
서희는 기준에게 말했다.
이 가게 사장님이 정직하시고 성품도 좋으셔
품질도 속이지 않고 좋은 물건을 싸게 파니
앞으로 이 가게에 와서 당신 속옷을 사면 될 거야.
남편의 속옷은 아내가 사주는 것이라고 하며
평생 모든 속옷을 서희가 준비해 주었기 때문에
기준은 자신의 속옷을 스스로 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서희는 기준의 양말, 러닝셔츠, 트렁크
긴 내의, 손수건 등을 평소보다 많이 고르고 난 후
두 살짜리 남자아이 네일을 보여달라고 했다.
기준은 서희가 왜 어린아이 네일을 사려고 하는지 의아했는데
집으로 돌아와 사온 속옷에 붙은 태그를 정리하며 말해 주었다.
내가 죽고 난 후 내 옷을 태울 때 이 애기 네의도 같이 태워줘.
내가 하늘나라에 가면 불이 나서 두 살 때 죽은 우리 아들을 제일 먼저 만나야지.
평생 함께하지 못했는데 하늘나라에서는 영원히 곁에서 지켜줄 거야.
이 말을 하며 서희 눈에 눈물이 젖어들었다.
다음날 새로 산 속옷들을 모두 세탁하여 뽀송하게 말린 후
반듯하게 접어 기준이 꺼내 입기 좋게 서랍장에 가지런히 정리해놓았다.
기준은 뽀송뽀송한 러닝셔츠와 면 트렁크를 꺼내어 몸에 가만히 대어보니
서희가 자신의 몸을 어루만져주는 것 같이 부드럽고 따스했다.
기준은 갈증이 느껴져 도어코로 나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마시다가
양념 이름이 붙어 있는 통들을 부었다.
서희가 병이 위독해져 병원으로 가기 전
스티커에 매직으로 꽃소금, 스테비아, 후추, 참기름 등
양념 이름을 써서 붙여놓은 것이다.
당뇨 증세가 있는 기준을 위해 설탕 대신 단맛을 내는 스테비아까지 준비해
통에 가득 담아놓았다.
그리고 노란 포스트잇에 당신이 좋아하는 돼지고기 두루치기와
소불고기 양념장은 냉장고 안에 밀폐용기에 넣어두었으니
고기에 적당량 넣어 주물럭거리면 돼
기준이 혼자 살면서 식사를 제대로 못할 것을 염려해
서희가 나름 고심에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기준이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 어김없이 밥상에는
고추장 양념을 다소 맵게 한 돼지고기 두루치기와
신선한 상추, 깻잎 등이 차려져 있었다.
기준은 유난히 돼지고기를 좋아해
평소에도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자주 먹었다.
기준은 서희가 해주는 것보다 맛있는 돼지고기 두루치기 요리를
어디에서도 먹어보지 못했다.
서희가 잘 아는 또 하나의 요리는 뚝불고기였는데
불고기 양념을 한 쇠고기를 온기 뚝배기에 넣고
육수를 부은 후 당면과 야채를 넣고 끓이다가
마지막으로 달걀을 깨서 넣어주는 음식이다.
생선보다 고기를 좋아하는 기준은
서희가 해주는 이 두 음식을 특히 좋아했다.
그래서 기준이 혼자 이 음식을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여러 양념을 섞어 양념장을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냉장고에 들어있는 밀폐용기 뚜껑을 열어
양념장의 냄새를 맡아보니
서희의 손맛이 나는 돼지고기 두루치기와 뚝불고기가
입안에 맴돌면서 그리움이 사무치게 묻어났다.
서희의 추억에 젖어 있자니
그 추억은 그리움을 가득 안은 채 가버린
다시 못 올 서희와의 지난 날을 꿈임없이 얘기해주고 있다.
비록 서희가 죽기 전의 시간으로 돌이킬 순 없지만
서희의 추억은 오롯이 남아
지금 이 순간에도 기준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서희와 평생 살아온 삶의 순간순간이 모두 근사했던 것은 아니지만
추억이란 이름의 창고 속에는
감미롭고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했다.
기준은 잊지 못할 그 추억을 꿈임없이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졌다.
그 추억 속에 남은 생을 비춰보며
서희와의 지난 날을 되서게 보는 것은
상처받고 힘든 일이 있을 때
기준을 일으켜 세워줄 소중한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 삶은 추억을 만들고
가끔씩 그것들을 꺼내보는 일을 반복하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추억이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고
실현된 미래가 또다시 추억이 될 거야.
지금 이 순간도 미래 어느 날 돌아보면 추억이 되어 있을 거야.
오늘은 어떤 추억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자
삶의 매 순간이 모두 중요한 시간이라는 깨달음이 밀려왔다.
그러자 허탈하기만 했던 빈 가슴 속에
앞으로 살아갈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기준은 예쁜 상자를 찾아 서희의 추억들을 정성스럽게 담았다.
기준은 혼자서 2주기 기일에 서희 산소에 갔다.
성묘를 마치고 나오는데 산소 입구로 들어서는
검은색 코트에 스카프를 두른 꽃을 든 여자가 있었다.
영미였다.
아무도 없는 정막한 공원 묘지에서
서희와 가장 친했던 영미를 만나니 우선 반가웠다.
기준은 서희의 장례식 후 영미를 까맣게 입고 있었지만
서희의 추억 속에는 분명 영미가 남편인 기준보다
깊게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영미는 서희가 기준을 만났던 훨씬 전 어릴 적부터
같은 동네에 살았고 학창 시절을 함께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서로 바빠 잠시 뜸했었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거의 매일 전화하며 시장도 같이 가고
근교에 놀러 다니거나 해외여행도 함께 다니는 것 같았다.
아마 기준과 함께한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영미와 같이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천천히 걸어오던 영미는 기준을 발견하고 걸음을 빨리 해
서희의 산소로 왔다.
서희 장례식 후 처음 뵈어요.
서희 기일이 되어 왔는데 이렇게 만나네요.
고맙습니다.
역시 영미 씨는 서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맞네요.
이렇게 잊지 않고 오시다니요.
서희가 좋아하겠네요.
영미는 무덤 앞 재단 옆에 있는 대리석을 깎아 만든 화병에
들고 온 꽃을 꽂고 잠시 묵념을 한 후
무덤에 도단한 잡초를 뽑아주며 말했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궁금해서 가끔 안부 전화라도 드리고 싶었는데
전화번호를 몰라서요.
따님들한테 물어보기도 쑥스럽고
일저일로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2년이 훌쩍 지나버렸네요.
이때 바람이 휙하고 불어와
영미 목에 느슨하게 걸친 스카프가 흘러내렸다.
검정 바탕에 자잘한 흰색 꽃무늬가 있는 스카프였는데
영미의 검은색 코트와 잘 어울렸다.
영미는 황급하게 땅에 떨어진 스카프를 주어
목에 한 바퀴 돌려 단단히 휘감아 메면서 말했다.
큰일 날 뻔했네요.
제가 가장 아끼는 스카프인데
바람에 날려갈 뻔했어요.
일본 호카이도에 여행 갔을 때
서희가 사포로시의 어떤 백화점에 있는
이세인 미야케 매장을 찾아내어
제 생일 선물로 사준 거예요.
이세인 미야케는 고급 일본 패션 브랜드인데
이 스카프를 일본에서 사면 반값에 살 수 있어요.
반값이라고 해도 꽤 비쌌어요.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선물로 사준 서희의 마음도 있고
스카프도 마음에 들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스카프예요.
오늘 서희한테 오는 날이라 일부러 두르고 왔어요.
서희는 이 스카프를 알아볼 거예요.
서희의 산소 앞에서 서희가 사준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서희의 추억을 말하는 영미를 바라보고 있자니
서희에 대한 기준과 영미의 추억이
어딘가에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영미의 모습에 아주 낯익은 서희의 모습이 서서히 겹쳐졌다.
기준은 이런 모습에서 사별에서 혼자 사는 영미와
자신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서로 엮여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들으셨나요?
남편 기준과 아내 서희는 23살에 만나 26살에 결혼하고
63살에 헤어졌습니다.
37년을 같이 살아왔죠.
그러니 그 두 사람의 기억의 서랍 속엔 얼마나 많은 추억이 쌓여 있었을까요?
아내를 떠나보내고 난 후 홀로 남겨진 기준이 아내와의 추억을 더듬어가는 여정은
마치 찬란하고 따뜻했던 시절을 함께한 아내를 떠나보내는 과정과도 같아 보였습니다.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남편의 마음이 애틋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혼자가 된 기준이 앞으로 남겨진 삶을 어떻게 채워나갈지 궁금해집니다.
즐거운 감상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이현숙 작가의 2년의 새로운 마디를 같이 감상하셨습니다.
저는 다음에 또 재미있는 작품으로 찾아오겠습니다.
다음에 또 뵐 때까지 행복하세요.
말하지 못한 내 마음은 이 밤하늘에 흩어져
그대에게 닿지 못하고 그냥 사라져가
별처럼 멀리 있는 그댈 난 그저 바라만 봐
손 닿지 않는 곳에서 혼자 그댈 사랑해
아무리 불러도 답 없는 그대
별이 지는 새벽까지 나는 여기 있을게 그대 모아
사람들 사이에서 그대의 웃음소리가 들려
내가 아닌 누군가와 행복해 보이는 그대
가슴이 아파도 웃으며 바라봤어
말하지 못한 내 마음은 이 가슴속에 묻혀져
그대에게 닿지 못하고 그냥 숨겨져가
별처럼 멀리 있는 그댈 나는 그저 바라만 봐
손 닿지 않는 곳에서 혼자 그댈 사랑해
그래도 나는 그댈 보고 있어
별이 지는 새벽까지 나는 여기 있을게 그대 모르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도 나는 괜찮아
그대만 빛나고 있다면
언젠가 내가 그대의 하늘에서 사라진데도
기억해줘 그댈 사랑했다는 걸
말없이 사랑했다는 걸
별처럼 멀리 있는 그댈 난 그저 바라만 봐
손 닿지 않는 곳에서 혼자 그댈 사랑해
이루어지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댈 사랑한 이 시간이 내겐 전부였으니까
별이 지는 새벽까지 나는 여기 있을게
나는 멀리서 그댈 비출게
언제까지나 그대의 별이 될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