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 인트로 00:30 한국인은 모르지만 외국인은 감탄하는 서울의 명소 10:04 서울의 상징 ‘5대 궁궐’의 뒷이야기 15:31 경복궁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는 방법 16:38 일본인들도 탐낸 서울의 동네 22:54 가까워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서울의 가치 26:05 유홍준 교수가 뽑은 한국 문화유산의 정수 29:24 30년 동안의 답사 끝에 남은 것
외국인들이 오면 골목을 사진으로 그렇게 많이 찍어요.
한 번 거기에 취한 사람은 한국의 사생팬이 되죠.
우리나라 밖에 없나요?
이런 스케일은 우리뿐이 없죠.
이게 서울의 필수 코스입니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다 감동받는 네 군데가 있어요.
안녕하십니까, 한석준입니다.
지식인 초대서 유홍준 교수님과의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저희가 지난 시간에는 전국을 돌았습니다.
이제 서울에 대한 이야기를 여쭤보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 정말 방문객이 많아지지 않습니까, 외국인들도?
그런 외국인이 하루 밖에 없답니다.
하루와 있는 외국인에게 그래도 이건 봐라 라고 한다는 얘기죠.
첫째, 경복궁을 가든 창덕궁을 가든 궁궐 하나 가야죠.
그중에서도 창덕궁을 권합니다.
왜요?
경복궁만 하더라도 초기에 지은 경복궁이라
중국에서 궁궐은 이렇게 지으라고 하는
주례 고공기의 룰에 맞춰서 지었어요.
그래서 자금성하고 설계도는 비슷하죠.
그런데 오해하면 안 되는 게 경복궁이 자금성보다 먼저 지었습니다.
삼문삼조, 광화문 지나면 흑래문, 흑래문 지나면 근정문, 근정문 지나면 근정선,
그리고 회랑으로 돌려있고 자금성은 오문오조이기 때문에 스케일이 다르죠.
그런데 그로부터 10년 만에 태종대에 지은 창덕궁은
이 룰에 의해서 지은 게 아니라 우리 건축의 중요한 특징이죠.
자연 지형에 맞춰서 건물을 배치를 했어요.
그래서 도나문으로 들어간 다음에 우회전을 해서 직각으로 진선문을 지나요.
그러고 난 다음에 좌회전을 해서 인정문을 지나면 인정전이 있어요.
동선이 일직선으로 해서 쭉 가는 거하고 이렇게 돌아가는 거하고는
하나는 권위적인 거고 하나는 인간적인 거죠.
억세스가 다른 거예요.
궁궐은 기본적으로 외교사절이라든지 국가의식을 행하는 공간이 얼굴에요.
경복궁은 근정전이고 창덕궁은 인정전이에요.
그다음에는 치조라고 해서 근무하는 곳이에요.
사정전, 정무를 생각하는 곳이 있고 생활공간인 연조라고 하는 거가 있는데
이게 경복궁은 근정전 뒤에 사정전 있고 사정전 뒤에 강령전을 쭉 뻗어있어요.
창덕궁은 인정전 옆에 사정전 있고 그 옆에 대조전 시정당이 있어요.
옆으로 가요. 그게 산 언덕 비타를 따라서 갑니다.
직선이 아니고 또 기울기로 이렇게 가요.
이거를 건축가 민현직 선생님이 멋있게 얘기했어요.
땅이 시키는 대로 건물을 배치했다.
일본이나 중국이나 유럽의 경우에는 반듯한 평지에 건물이 들어왔는 형식이잖아요.
경복궁이 그렇게 했단 말이에요.
원래 비탈이 있었을 텐데 다 가는 거죠.
근데 창덕궁은 이렇게 옆으로 딱 들어가요.
그리고 난 다음에 언덕 너머에 후원이 있는 거예요.
그 후원이라고 하는 거가 무슨 인공적으로 조성한 게 아니라
산비탈에 계곡을 따라가지고서 정자를 배치를 해놓으니까 참 재밌어요.
후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그냥 야산이에요.
근데 그것을 물길을 내가지고 물길 있는 곳에 정자 하나씩 넣으면
그게 다 명소가 된 거란 말이에요.
그 정자가 지금 현재 남아있는 게 17개가 있어요.
가장 대표적인 게 부용정에서 시작해서 예련정이 있고
존덕정이 있고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인조가 실을 써놓은 옥류천 계곡이 있단 말이에요.
유럽이나 중국, 일본의 정원은 인공적인 공간에다가
나무를 심고 뭘 만들어서 자연을 재현한 것이 정원이에요.
근데 우리는 자연 속에 건물을 배치해서 그 전체가 정원이 됐단 말이에요.
인공과 자연의 관계가 역전이 돼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 밖에 없나요?
이런 스케일은 우리뿐이 없죠.
그러니까 자연과 조화한다는 개념이 우리하고 달라요.
그래서 우리는 정원이라기보다 옛날 사람은 원림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원림을 만들 적의 기본이
자연경관을 끌어들이는 착용을 한다고 하는 거를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얘기를 하는데
우리는 끌어들이고 말고가 없어요.
있는 데에 건물만 배치하면 정원이 되는 거예요.
제일 대표적인 정원이라고 하는 소세원의 경우에
양옆에 광풍각, 제월당 지어놓은 거가 그 외에 뭐가 있어요.
그러니까 서양의 기준으로 봤을 때
우리 정원이 초라하다든지 스케일이 작다고 얘기하지만
인공을 가한 게 적었다는 것뿐이지
정원 자체는 우리가 훨씬 더 크죠.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지은 집이 다 여기저기 많이 생겨요.
한남동에 있는 리운만 하더라도
램쿠라하스, 마리오보타, 장루벨
안도다다오의 건축은 뮤지움산도 있고
본테이짐도 있고
자하하디드가 DDP
이분들이 와서 한국에 건축을 지을 때는
당연하게 그 나라의 전통 건축을 하는데
이 사람들이 다 감동받는 공통된 곳이 네 군데가 있어요.
필수 메모네요.
1. 종묘
2. 창덕궁의 후원
이렇게 밋밋한 산자락을 정원으로 환원시켜 놓는 거
3. 병산서원
만대로에 앉아서 낙동강 흘러가는데
앞에 병산이 병풍처럼 쳐 있는 거
또 하나가 부석사, 무량수전
정확하게 최순우 선생 말씀대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소백산맥 멀어져 가는 거
쫙 보는 거
이거에 그렇게 반해요.
하루를 본다면 창덕궁 후원을 봐라.
보고 종묘를 봐야 되고
그건 기본이에요.
저녁 때 시간 나면 인사동을 가야죠.
인사동에 지금은 고서점이니
화랑은 없어졌어도
미니예쁜 가게가 있고
사람들이 어울리고 있는 뒷골목들
꼬불꼬불해서 온망족망해서
특히 외국인들이 오면
골목을 사진으로 그렇게 많이 찍어요.
얼마나 정겨워요.
그리고 인사동 길이 굉장히 인간적 채취
휴먼 스케일이라는 게 굉장히 강한 거리거든요.
인사동 길은 직선이 아니라 S자로 휘어 있어요.
안국동 로타리에서
인사동 내거리로 가는 데까지가 500m고
거기서 종로 2가까지 가는 길이
직선이 아니고 이렇게 S자로 휘어 있어요.
메인 길이 그런가요?
미처 몰랐습니다.
못 느끼죠.
왜 그렇게 됐냐면
그게 본래 물길이었어요.
계천을 복귀한 거예요.
이 길이 이렇게 휘었잖아요.
그러네요.
S자로 이렇게 휘었다는 것이
갖는 의미가 뭐냐면
여기에서 일로 걸어갈 적에
저 끝이 보이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앞에 시퀀스가 변하는 겁니다.
인천국제공항이 세계에서 가장 잘 지은 공항으로
평가가 해마다 나오잖아요.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유선형으로 휘었습니다.
곡선이기 때문에
저 끝이 그냥 황량하게 쭉 보이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가게가 이동해가면서
자기의 현재 위치가 갖고 있는 안정감이 있는 거죠.
경우에 따라서는 명동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인사동이 그렇죠.
이게 서울에 오는 사람들의 필수 코스
그중에 종묘는
종묘를 보고 예찬한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얘기가 굉장히 많아요.
프랑크 게리라는 건축가가 한 얘기예요.
이 프랑크 게리가
세계 곳곳에 자기 건축이 있는데
한국에만 없어요.
하고 싶어요 해요.
아들 둘 며느리 둘 다 건축가예요.
우리 가족 여행으로
세계적인 건축을 함께 보자.
어디로 갈 건가.
프랑크 게리가
서울의 종묘를 봐야 된다.
그 이후는 너희들 어디를 가더라도
거기는 우리 가족이 다 같이 간다.
그 길이가 100m입니다.
기둥 19개
지붕만 딱 낮게 눌러 앉아 있고
월대 1500평 되는 박석 위에
양옆으로 회랑도 없이
담장이 낮게 내려있잖아요.
그리고 감싸는 그 긴장감
그거 보면서
무엇이 이렇게 감동을 주입니까
당신에게 물어봤더니
건축으로 이렇게 고요하면서
경건한 공간을 만든 건
이건 기적에 가깝다.
더군다나 5월 둘째 일요일 날
종묘제례가 열려요.
박석 위에서 팔일무를 추면서
종묘제례가 이루어지는 거 보면
음악과 무용과 건축
그리고 유교라고 하는 정신이 어울리죠.
종묘제례만 갖고 얘기해도
일제강점기에 못 지냈잖아요.
그래도 김천흥, 장사원, 이혜우 같은
음악인들이 종묘제례를 지켰어요.
끝까지 지켜서 악보도 만들고
연습도 시키고 해가지고
해방이 되고 난 다음부터
중국이 문화대혁명 한다고 해서
문화를 다 박살냈잖아요.
중국의 종묘제례가 없어져 버렸어요.
그때가 다시 복구하기 시작하니까
우리 종묘제례를 배워가는 거예요.
그렇게 연결되어 오는 그걸로 보면
우리나라의 궁궐건축, 종묘
또는 종묘제례 이거가
동아시아 지평 내지는
세계사적인 지평에서 봤을 적에
더 그 존재 가치가 확 올라옵니다.
서울 성가학을 한번 올라가 보면
정말로 환장하게 아름답죠.
요즘에 외국에서 오는 관광객에
등산하러 오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거 아닙니까?
그게 이제 우리나라 산맛을 본 거예요.
우리나라에 장어만 사는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어떤 산이든지
다 올라갈 수 있어.
고무신 신고도 올라갈 수 있잖아요.
등산이 일반화됐는데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등산복인이
이거 얼마나 잘 꾸려왔냐.
세상에 알프스도 갈 수 있는 복장으로
인사동에 나타나는 거는
이건 대한민국뿐이 없다는 거예요.
그게 산과 연관이 돼 있는데
서울 성가학을 개방을 해서
인왕산까지 돌 수 있었던
그 코스를 즐기는 거는
아주 고급 코스죠.
근데 한 번 거기에 취한 사람은
한국의 사생팬이 되죠.
내가 문화재청장하면서
최고의 업적이 부각산 개방이었을 거예요.
엄청 싸우셨을 텐데요.
엄청 싸웠죠.
거기에 걸리는 게
나는 성가학만 개방한다.
성가학은 문화재잖아요.
내가 관할이잖아요.
사실 생각해보면 서울이 그렇게 넓은 건 아닌데
좁은 서울 안에
궁궐이 5개나 있는 이유가 뭔가요?
서울에 뭐 때문에 5개나 있냐고 얘기하지만
그 히스토리를 알면
전부 다 가보고 싶게 돼요.
처음에 경복궁을 지었잖아요.
그랬다가 왕자의 난 있어서
개성으로 갔다가
이방원이 태종이 되면서
창덕궁 지으라고
군신들이 얼마나 반대했는지
아니 지은 지 10년도 안 돼서
지금 또 이걸 하면 어떻게 됩니까?
태조 이방원이 솔직해요.
피비린내가 나서
나 거기 가기 싫다.
그 대신 궁궐이란
양궐 체제로 있는 게 맞다.
법궁이 있고
이궁이 있어서
유사시에 옆으로 옮겨가는
양궐로 해야 된다.
법궁은 경복궁으로 남기고
생활하면서 일하는 건
창덕궁으로 하겠다.
그래서 지었어요.
그렇다는 뜻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당시에 최고가는
건축가 내지 토목기술자인
박자청이라고 하는
공조판사
천민 출신이었대요.
성실하고 기술이 좋아서
승진에 승진을 해서
장관까지 이룬 분이에요.
근데 박자청한테
거기에 연회를 열
경회루를 지으라고 그랬어요.
그랬는데 태종이
생각한 것보다
너무 크게 진 거야.
박자청의 입장에서는
거기가 원래 습지
자연 연못 같은 거 있는데
그거를 파가지고
거기서 나온 흙을
대조전 뒤에 있는
아미산 동산을 만들었죠.
근데 더 기가 막힌 거는
경회루 건물 있죠?
그 건물이
2층 건물인데 위가
300평에서 2평 모자라
298평이에요.
300평이니까
1평에 1명씩 서도
300명이지
1,100명이
파티를 연 기록이 있어요.
1,100명이?
거기 올라가도
너끈해요.
그거를 설계에서 시공까지
8개월 걸렸어요.
엄청 빨리 이치셨네요.
이 시절에도 그렇게는 못합니다.
중장비 다 동원해도
설계에서 시공까지
8개월이 안 돼요.
옛날 사람들 일하는 것을
우리가 잘못 계산하는 게 많아요.
수원 화성 있죠?
그것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에요.
수원 화성이
5.8km 정도 돼요.
그게 설계에서 시공까지
32개월 걸렸어요.
아마 다산 정약용의
거중기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빨리 질진다는 게
우린 지금 상상이 안 가는데
내가 언제고 답사하게 쓰겠지만
하나 힌트 알려주시네요.
그게
내가 반드시 쓸 거가
두 개념이 있어요.
하나는 정조대왕이
아름다움이라는 게
전쟁과는 관계 없지만
그 아름답게 싸움으로써
그거를 지키려는 의지가 강해지니
아름답게 싸워라.
그다음에 수원 화성이
계곡이 있고
언덕으로 이렇게 빙글빙글 돌잖아요.
정조대왕이
자연 지형을 따르되
봄날의 아름다운 버들잎 모양으로 둘러라.
정조대왕 너무 까다로운 분이신 거 아닙니까?
엄청 까다로웠지.
이런 건축 정신이
창덕궁 짓고 하는데도
다 그대로 있는 거예요.
정도전이 조선 왕조의 설계자인데
경복궁을 짓는 원리에 얘기하면서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사치스럽지 않게 하라.
이 얘기가
김부식이 백제 본기
온조왕 15년
BC 4년
작신궁실
새로 궁궐을 지었다.
근데 거미불로 화이 불치했다.
라고 한 말을 그대로 해요.
워딩만 다르고.
그러니까 이게 백제의 의미이면서
조선의 의미예요.
한국 사람들의 주문이 대체로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경복궁을 지었는데
임금들이 경복궁에 안 살고
창덕궁에서만 살려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편하잖아.
경복궁 살고 싶겠어요?
썰렁해서.
그리고 임진왜란 때
싹 불타버렸어요.
그러면 전쟁 끝나고 복원하잖아요.
경복궁을 복원 안 하고
창덕궁을 복원하는 거야.
조선 왕조에
임금은 황갑 지난 게
2명인가 3명.
부인네들은 또 오래 살아.
그러니까 왕이 바뀌어도
왕의 어머니, 할머니
줄줄이 있는 거예요.
이분들을 모시는 공간이 창경궁이에요.
근데 일반 궁하고 궁궐하고 달라요.
운영궁은 흥선대용군이 살던 궁집이지만
궁궐은 아니야.
그럼 궁궐은 뭐냐?
반드시 정전이 있는 곳이 궁궐이에요.
외조공간, 근정전, 인정전.
창경궁에는 명정전이 있잖아요.
임금이 상주할 가능성이 있는 곳은
정전을 지은 거예요.
그 대신 거기에는 조금
소략하게 지었지.
오래 있을 곳이 아니니까.
그 다음에는 수창궁이니
운영궁이니
궁이 있는 건 왕족이 사는 곳이죠.
창덕궁, 창경궁 합쳐서
동궐이라고 그랬어요.
양궐 체제라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서궐로 지은 게 경의궁이에요.
궁궐 4개가 알게 됐죠.
이제 덕수궁에 들어갔는데
덕수궁이라고 하는 데는
본래 경운궁이라고 그랬어요.
궁궐은 아니고 궁집이었어요.
근데 바로 고정왕제가
명성황후 시위가 된 다음에
아관파천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다가
다시 나올 적에 경복궁으로 안 가고
경운궁으로 옵니다.
근데 경운궁으로 와서
여기서 대한제국을 선포하잖아요.
여기에 근대식 건물로 지어서
중명전이니 돈덕전이니
정관을 짓고 근무하다가
중명전에서 태익을 파견하잖아요.
그래갖고 일제가 고정을
강제로 폐위시켜버리죠.
그때 순종이 창덕궁에서
저기를 합니다.
이 경운궁에는 고정왕제가
그대로 남아있었어요.
순종이 아버님 오래 사시라고
덕덕자의 목숨 숫자로
덕수궁이라고 이름을 바꿉니다.
그리고 덕수궁 안에
근대식 건축이 그렇게 많이 있는 거예요.
궁궐 5개를 한 바퀴 돌아보는 거는
외국인보다 한국인이면
한 번 해볼 만한 것은 아니겠어요.
혹시 경복궁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한양도성이 18.6km일 거예요.
근데 이게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하는데
실패를 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게 12km예요.
중간에 잘렸잖아요.
남대문 옆에 잘리고
그래도 이거를 다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를
난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거 등재할 쪽에는
경복궁과 한양도성을 합쳐서
신청을 하면 된다고 봐요.
왜냐하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안 될까 봐
종묘하고 창덕궁 합쳐서 등재를 했거든요.
한양도성은 경복궁이 있다는
전제하에 쌓아진 거니까
그리고 복원에는
원형을 복원하는 것도 있지만
자취를 복원하는 게 있거든요.
이를테면
남대문하고 상공회의소 사이가
뚫렸잖아요, 길로.
그 뚫린 그 부분은
화강암으로 깔아놓으면
지금 차로 지나가지만
헝각을 지납니다라는
개념을 확실히 주죠.
그런 식으로 하면
당연히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됩니다.
시각적으로도 아름답고
어려울까요?
아니에요. 결국은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럼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서울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지나요?
한양도성 안의 인구가
10만 명이었습니다.
얼마 안 되죠.
1934년 될 때는
도시가 팽창해가지고
이제 사람 주택 문제가 엄청나는 거예요.
그때의 한쪽으로 개발한 거가
성북동이에요.
삼성교회에서부터 그 산자락에
그 성북동이 문화적으로
서울의 아주 고고가 되는 거가
초선왕조가 한양도성을 두르고 난 다음에
성저심리, 성아래심리는
그린벨트로 묶었어요.
성북동이 있는데
아무도 살지 못하게 했어요.
그랬는데
2인자의 난이라고 영조 때 난리가 나요.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이후
내전이 없는 나라예요.
왜 내전이 없었냐.
봉건제가 실시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봉건제라고 하는 거는
지방의 영주가
군사권, 경제권, 사법권을 갖고 있는 것이
봉건제.
그러니까 난리는 나도
내전은 없었답니다.
근데 2인자의 난이 나가지고서
군걸까지 침해받으니까
왕조 입장에서는
거기를 그렇게 두는 것보다
둔전이라고
군대를 입주시켜가지고
유사시에는 하더라도
사람들이 생활하면서
농사 짓고
숫자가 30여 명이었을 거예요.
근데 거기가
오랫동안 농사를 안 져서 땅이 황폐하니까
농사 져서 먹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
개성에서 말린
못이 돼
이것을 표백하는
권한을 준 거예요.
계곡물에서 그걸 말아?
계곡물에, 맑은 물에
채검정이 있는데
동네 사람들한테는
군걸에서 쓰는
매주 납품의 권한을 줬어요.
그런 식으로 해서
사람들을 살게 하는데
우리 백성들이
땅에 놔두면
가만 안 놔두잖아요.
동네 주위에다가
유실수를 심어.
복숭아.
복사꽐로
그렇게 아름다운 거예요.
그래서 여기를
정조대대해가지고
서울 장안의 명소를
얘기하는데
최고가
첫째가 지금
배화여고 있는데
두 번째는
성북동에 가서
복숭아꽃 보는 거였어요.
그러면서 이제 사람들이
꾸역꾸역 들어와서
여기저기 살기 시작을 하다가
1934년에
도시가 팽창될 적에
전차끼리
삼선교에서
도남동으로 난단 말이에요.
거기가 전부
바치고 뭐고
이렇게 돼 있었는데
거기에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거야.
상어 이태준
만혜 한용은
근원 김용준
백양장 배정국
나중에는 박태원
조지훈
문인들이 그렇게
일로 들어와요.
그 이유가
원래 문인묵객들이
도심 속에 있는 것보다
운치 있는 걸 좋아하죠.
거기다 도심에서
떨어지니까
땅값은
상대적으로
싸죠.
그거보다 더 중요한 거가
도성 안에 있는
12만 명 중에
3만 명에서
4만 명 사이가
일본인이었어요.
이 일본인들이
전부 회현동
신세계백화점 있는 데에서
필동
이 일대에
진을 쳐가지고
청계천까지 쳐들어왔어요.
그리고
서촌
북촌에서도
지금 율곡로 있는데
거기까지는
일본인들이
쳐들어와서
적산가옥들이
나중에 쭉 있어요.
성북동은
일본인들이
들어오질 않았어요.
그게 우선
그들에게는
큰 매력이었던 거죠.
그렇게
일본의
문화주택이라고 해가지고
집 들어오는 것을
막은 게
정세권이라고 하는
건축왕이
가회동
익선동
창신동
이런 데에다가
25평 기준으로
담장 있고
마당 있고
표준 한옥을 지어요.
그게 가회동 31번지
한옥마을이에요.
가회동 31번지는
1930년대 진 것들이에요.
익선동 골목이
그렇게 돼 있는 것도
정세권 작품이죠.
당시에
부자가
광산왕 최창학이라는 분이
금광을 해서 부자야.
유통에서는
화신백화점 했던 박흥식이고
건축왕이 정세권이에요.
근데 정세권은
돈 버는 것을
전부
한글학해
지원하고
독립운동 지원해요.
나중에 다 몰수되고
감옥살해도 하고
그런
매력을
갖고 있는데
성북동은
이태준을 비롯한
문인들이
차지해가지고
1938년에서
40년까지
문장지
30여 권 나오는
고향이 바로 거기야.
근데
1941년에
일제애가
조선말을 못 쓰게 해요.
모든 잡지들을 다
일본말로 해가지고
책을 내게
강요를 해요.
그때 문장지는
거부합니다.
마지막 호가
폐간호라고.
우리는 이거 내고
그만 내란다.
세상에
잡지가 나오면
창간호는 있지만
폐간호라는 게
어딨습니까?
아니
그 시대를 사셨어요?
어떻게 이렇게
세세하게 다 알고 계십니까?
서촌은
그거보다 더
뿌리가 깊은 데
서촌이야?
뭐 지금도 다니면
그 세종대왕
태어나신 데라고
이렇게 비석도 박혀있고
난 그거가
조금 불만인 게
아 왜요 왜요 왜요?
세종대왕이
그 동네에서 태어난 건
맞아요.
근데
평민들이 사는 동네를
세종마을이라고 그러면
어울립니까?
그거보다는
민의 채취가
살아있다는 데
더 의미가 있는 거잖아요.
거기에
청운동 오긴동 일대에는
어마어마한 친일
부자가 있었어요.
이완용이 집하고
윤덕영이 집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동네에 있는
땅을 다 매수해갖고
오긴동 일대에
지금 맹하학교 있는 데까지
그 두 집이었다가
나중에 이제
다 쪼개져가지고
지금처럼 분양이 됐는데
청운동 쪽은
또 다른
코스예요.
청운초등학교 있는 데에서
아주 그윽한
안동김씨 별서가 있는 곳들이고
거기에
송강정철도 태어나고
욱의 성원도 거기에 있었고
서촌 있는 데는
중인들이 많이 살았어요.
거기 수성동이라고 하는 곳이
그 오긴아파트라고 하는 게
옛날에 헐어버렸잖아요.
헐고 났더니
옛날에 겸재정선이 그렸던
기린교 돌다리가 나왔어요.
그리고 복원했어요.
굉장히 멋있습니다.
비 올 때 거기를 한번 가봐요.
추사김정이가
그 아래
통인동에 살았었거든요.
수성동에 비 오는 날 가서
그리고 거기에
안평대군이 살던 집터가 있고요.
근대로 얘기하면
윤동주도 거기서
하숙 생활한 적이 있고
이중섭도 잠깐 살던 데가 있고
이상이 살던 집이 있고
다 지금 기념적인 건물로 돼 있거든요.
문화사의 한 장면들의 채치가 있는데
골목길들이 그대로 살아있거든요.
그게 서촌의 가장 큰 매력이에요.
서울의 문화유산을 답사할 수 있는
관광코스를 추천해 주신다면?
우리가 백제라고 하면
백제 역사 700여 년
한성백제가 500년이고
웅진백제가 70년이고
부여사비백제가 120년이에요.
한성백제가 500년이야.
제일 긴 시기잖아요.
한성백제 시절의 유적, 유물들이
지금 풍납토성, 몽천토성
석촌호수에 있는 거예요.
한성백제 박물관을 중심으로 해서
백제의 유적이 있고
그거에 앞서서
암사동의 신석기 시대 유적이 있거든요.
또 조금 더 올라가면
미사리의 신석기 유적이 있어요.
그거가 무대의 기로
서울의 한 코스가 되죠.
몽천토성을 중심으로 해서
석촌동으로 해서
한성백제 박물관을 보는 것은
그건 중요한 하나로 남고
그다음에 조선왕조로서
궁궐이 5대 궁궐이 있잖아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의궁, 덕수궁
거기에 플러스해서 종묘와 사직
서울이 가장 우리가 가까운
근대와 조선시대를 살았던 곳이기 때문에
서촌에서부터 북촌으로 이어지고
인사동으로 이어지고 있는
그다음에 봉은사와 선정릉이라고 하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왕릉과 사찰이 있죠.
거기에 지금은 서울로 편입된
양천현령, 양천향교가 있는 곳에
겸재정선이 거기에 5년간 근무를 해서
겸재정선 박물관이 있는 게 있고
동의보감을 쓴
허준박물관이 있는 게 또 강서에 하나 있고
그리고 내가 마지막에 쓴 게 망울의 공동묘지
거기는 지금은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바뀌어서
우리 근대를 살아갔던
아주 훌륭하신 분들의 묘소가 거기에 있어서
마치 지금은 공동묘지가 아니고
근대 역사 인물들 보고
그 밑에 유관순 열사의 혼이 남아있어요.
그 유관순 열사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것이
이분이 감옥 생활하고 결국 죽잖아요.
죽어서 이와 학당 사람들의 장례를 치러서
이태원 공동묘지에 모셨어요.
그런데 1934년일 거예요.
수도권을 개발하기 위해서
사대멍 가까이 있었던 묘소들
이태원 공동묘지, 노고산, 아현동, 미아리 공동묘지
이 공동묘지를 전부 이장을 시킨 게
망울의 공동묘지예요.
그거를 이장시킬 적에
미친 날까지 이장하니까
다 알아서 이장시키시오 하고 통보를 했는데
아무 연락이 없는 사람들은
무연고묘라고 그랬어요.
이태원 내 무연고묘가 아마 2만 기 정도 됐을 거예요.
유관순 열사의 묘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까
유관순은 후손이 없잖아요.
무연고묘로 함께 화장을 해서
한 줌의 재로 합동묘비가 서 있어요.
그게 망울의 역사 문화 공원의 모습이죠.
이것도 평창동 창의문 바깥에 세검정
사실상 석파정까지 포함해서
조선시대 때 유적과 유물이 남아있으니까
엄청 많은 거예요.
선생님, 한국인의 정서를 담은 문화유산
어떤 걸 뽑을 수 있을까요?
문화유산을 얘기하면
무형유산과 유형유산으로 나뉘어요.
유형유산은 동산유산과 부동산유산으로 나뉘어요.
이 동산유산 중에서 가장 한국적인 건 다랑아리
백자 다랑아리라고 우리가 부르는 건
둥그스럼한 흰 백자잖아요.
백자 다랑아리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건
높이 45cm 크기로
1725년에서 50년 사이
금사리 까마에서 만든 항아리를
백자 다랑아리라고 그래요.
요새도 만들지만 국보 보물로 지정된 건
그것을 얘기하는 거예요.
근데 그 당시에는 엔진, 동력이 발견되지 않았어요.
발로 차면서 몰래 돌려야 되잖아요.
그때는 외국도 마찬가지여서
이와 같이 보름달처럼 큰 배호를 만드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올라가면 짜부가 되잖아요.
근데 조선의 도공은 둥그스럼한 배호를 만든 거예요.
어떻게 만들었는가?
이마만한 왕사발을 두 개를 만들어서
가운데로 붙였습니다.
요즘에 만드는 것은
그냥 기학적인 다랑아리예요.
영조시대 때 만든 다랑아리는
둥그스럼하고 손자국도 있어요.
자세히 봐보세요.
그렇게 대놓으니까
기학적인 원이 아닌
둥그스럼한 원이 주고 있는
인간적인 채치가 나오는 거예요.
거기에다가 빛깔은 설백색인 경우도 있고
유백색도 있고
부드럽게 윤기나는 경우도 있고
또는 윤기가 없어져서는
아주 담백하게 나오는 것도 있어요.
다랑아리를 보게 되면
사람이 편안해요.
여백의 미 속에서 자기를 체험하는 거예요.
디테일한 걸로 얘기하면
수아 김한기 선생이
다랑아리를 그렇게 많이 그렸어요.
그분 글을 보면서
나도 새롭게 깨달은 게
백자 다랑아리는
구연부보다 굽이 좁기 때문에
놓여 있는 것 같지 않고
둥실 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 글을 읽고
구연부보다 굽이 좁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저는 오늘 선생님 말씀 듣고 처음 알았습니다.
이런 걸 보면
조형적인 긴장미가 딱 잡히죠.
이게 동산문화재에서 한국의 이미지고
그다음에 부동산문화재로서
한국의 이미지, 한국의 산사
7군데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했어요.
그 이름이 템플이 아니고 산사야.
그 이유가 우리나라의 산중에 있는 절은
기도처이면서 수도처예요.
스님들이 참선하고
대종들이 연불 드리는 공간이에요.
이건 우리나라의 자연적인 산 속에서
형성된 종교시설이라는 거죠.
아울러서 아직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못했지만
된다고 보는 게 누정이에요.
누정은 개인의 정자가 아니고
관에서 지은 겁니다.
그러니까 각 현군마다
경복궁에 경외루가 있듯이
각 고울마다 계곡과 경치 좋은 곳에는
누각이 하나씩 있어요.
진주 촉성루, 미량의 영남루, 청풍 한병루,
남원 광알루, 영변의 백상루
이거는 자연 풍광과 건축이 함께 합쳐있는 거고
기차 타고 갔는데 저 언덕에 정자 하나 있으면
얼마나 멋있어요.
그럴 때가 있죠.
그게 우리가 자연과 삶을 같이
아우르면서 사는 태도였죠.
교수님 이렇게 오랜 시간 답사를 통해서 배운
교수님의 인생의 지혜가 있다면?
인생도처 유상수
인생을 살려보면 도처의 상수가 있다.
내가 아무리 공부하고 가도
현장에 가서 보면 나보다 훨씬 더 잘 아는 분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거기에 오래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꼭 물어봅니다.
문화재청정대구 초도순시하는데
경복궁 갔더니 경복궁 소장한테
경복궁이 언제가 제일 예쁘니까?
그랬더니 비오는 날 한번 오십시오.
경복궁 근정전 있는데 박석이 쫙 깔려있잖아요.
그게 이 아래쪽하고 위쪽하고 표고가
70cm 차이가 납니다.
기울기가 물길이 그렇게 흘러오는 거잖아요.
그 물길이 흘러가는 게 박석들이 깔려있으니까
박석 사이로 이렇게 물길 찾아가지고
쫙 가는 그 모습으로 그냥 배우는 거죠.
교수님 오늘 정말 장시간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가들의 진짜 지식을 전하는 지식인 초대서
오늘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이신
유홍준 교수님과 함께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