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로부터 절대 독립 못 하는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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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유럽의 식민 지배를 겪었던 남미
대륙은 19세기를 기점으로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고 오늘날 대부분 독립
국가로서 그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남미 대륙에서
아직까지도 열강의 해 영토로 남아
있는 지역이 한 군데 있습니다 바로
남미 북부에 위치한 프랑스령 기아나
있데요 왜이 지역은 다른 국가들
특히나 영국령 기아나 네덜란드령
기아나 마저 모두 독립한 상황 속에서
아직도 프랑스의 해 영토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기아나 지역에 처음으로
인들이 도달한 시기는 15세기 후반
무렵이었습니다 크리스토퍼 콜롬버스가
1998년에 처음 이곳을 발견한 이후
스페인의 여러 탐험가들 또한 기아나의
도달하여 탐험을 이어 나갔으나 당시
험준한 정글과 늪지로 이루어진
기아나의 지형은 다른 지역들 다
자원을 확보하기 까다롭게 만들었고
정착 또한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스페인은 자원이나 노동력 확보가
쉬운 다른 지역들의 식민지화에
집중하기로 결정했고 이후 16세기
동안 아스텍 잉카를 포함한 중남미
대륙의 지역들이 스페인의 손에
떨어지는 동안 키아나는 유럽인들의
초기 식민 지하를 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노예 확보를 위한
간헐적인 습격이 벌어지곤 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17세기에 접어들며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유럽의 신흥
세력들이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탐험에 뛰어들고 아메리카 곳곳을
누비기 시작하면서 기아나 또한 결국
유럽인들의 욕망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특히 16세기 후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네덜란드는 해양 강국으로 부상하며
세계 곳곳의 영향력을 투사에 나가고자
하였고 1616년에 이러 결국 기아나
지역에도 정착지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이후 네덜란드가 기아나의 식민지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동안 프랑스와
영국도 기아나 지역에 눈독을 들이며
식민지를 설립하고자 했고 이렇게 새
국가는 기아나 둔 쟁탈전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나 네덜란드와
영국은 17세기 중반부터 영란
전쟁으로 불리는 수차례 전쟁을 벌리고
있었는데이시기 양국은 본토인 유럽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전투를
벌리며 기아나 지역을 포함한 서로의
식민지를 시시각각 점령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1667년에 2차 영란 전쟁이
네덜란드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을 때
네덜란드는 당시까지만 도 덜 같이
있어 보이는 북미쪽 식민지를 영국에
넘겨주며 그 대신 영국령 기하나 및
여러 섬들을 영국으로부터 양도받을 수
있었습니다 영국이 철수한 기아나
지역엔 네덜란드와 프랑스만이 남아
식민지 확장을 이어나갔죠 이후
남미대륙의 다른 지역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잠식되어 가는 동안 향후
기아나 100년 넘게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식민지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네덜란드와 영국이
기하나 두고 치고받고 싸웠던 기간
동안 프랑스는 초기 몇 번의 분쟁을
제외하고는 꽤나 안정적으로 기아나
소요를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영국과의 7년 전쟁에서의 처참한
패배로 인해 대부분의 식지를 죄다
빼앗겼을 때에도 이곳 기하나 만큼은
수만에 간직할 수 있었죠 그리고
오히려 식민지가 거의 남아나지 않은
덕분에 프랑스는 그간 거의 손도 되지
않아왔던 기아나 마저 감지덕지하며
개발해 나가고자 하였고 본토 내에서
금과 자원이 넘쳐난다는 홍보를 펼치며
수천 명의 달하는 정상민 기아나 밀어
넣었습니다 그렇게 수개월을 걸친 항해
이후 기아나의 도달한 정상민 앞에
놓인 광경은 험란한 정글과 그 안에
살아가는 적대적인 원주민 부족 그리고
말라리아 따위 위해 질병 들이었습니다
부품 기대로 가득찼던 정착민들은
지옥과도 같은 정글의 환경 속에서
공구에도 돌아가지 못한 채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챌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2년 가량이 지난 후 그곳에는
주변 섬들로 뿔뿔이 터져 간신이
목숨을 연명 중인 수백명의
생존자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후에도 프랑스 당국은 기아나의
완전한 정착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무려
15,000명의 달하는 프랑스인들을
다시 기아나 밀어넣었고 수년에 걸쳐
12,000명 가량이 희생을 치르며
꾸역꾸역 식민지 설립을 이어
나갔습니다 이후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혁명 정부가 반대
파드를 잡아다 기아나 밀어 나왔고
이렇게 기아나 점차 반정부 인사와
죄수들의 유배지로 기능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사이 유럽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거대한
변역을 겪고 있었고이 과정에서
네덜란드는 프랑스에 점령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함께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하였고 그 과정에서 영국은
네덜란드가 소유하고 있던 남미
식민지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네덜란드 또한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바로 네덜란드는 기아나 지역의
일부를 영국에게 넘겨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가이아나 수리남
그리고 프랑스령 기아나의 구도가 된
것이었죠 아무튼 19세기 무렵이 되어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끌어다 기아로 보냈고이를
통해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19세기 초반까지는
기아나 노예 노동력 덕분에 수많은
농장에서 사탕 수수나 커피 같은 열대
작물들을 재배하여 괜찮은 식민지로서
한동안 번성할 수 있었죠 그러나
기아나 보내진 노예들이 지속적으로
밀림으로 도망치면서 농장들은 점점
노동력을 손실에 갖고 19세기 중반이
될 쯤에는 이미 노예 노동으로 먹고
사는 농장들 대부분이 쇠락의 길에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설상가상이 같은시기 유럽 내부에서는
노예제 폐지에 대한 목소리가 점점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결국 프랑스 또안 1848년
노예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하며 이미 다
죽어가던 기아나 플랜테이션 산업의
관장 문에 대못을 박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기아나의 경제가
붕괴하자 프랑스는 어떻게든 식민지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 노예 대신
인도인 중국인 등의 저렴 노동력을
대거 기아나 모집하였고 이에 한술
더떠 부족한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아예 기아나의 교도소를 차려 프랑스의
죄수들을 이곳으로 몰아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프랑스는 계약
노동자와 조수라는 새로운 노동력을
바탕으로 몰락하던 기아나 다시금
부흥시켜 나가고자 하였죠 그리고
이렇게 죄수들을 데거 몰아 놓은지
불과 1년만인
1855년에 기아나 내부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 소식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유학 금을
노리는 이민자들이 세령 기아나
몰려들며 막대한 경제성장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했고 이러한 골드 러쉬는
기아나의 추가적인 금강이 발견됨에
따라 20세기에 들어선 이후로도 더욱
많은 이민자들을 기하나 불러들였습니다
그 결과 과거 기아나의 먹여 살리던
플랜테이션 산업은 사실상 사장되었고
1920년대 무렵에는 만 명이 넘는
광부들이 기아나 곳곳을 누비며 지역
경제를 견인해 나가고 있었죠 그러나
이러한 기아나의 기형적인 경제 구조도
언제까지고 지속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수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프랑스 당국이 기아나 특히 그
중에서도 악마의 섬이라 불리는 곳에
설립한 수용소에 관한 소문은 점점
프랑스 내부에서 퍼져나가며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1923년 프랑스의 한
기자는 기아나의 방문하여 죄수들이
어떠 환경에서 살아가는지 낱낱이
취재하였다 이들이 기아나의 강제노동
기아 질병 등 온갖 인권 유인의 참극
속에서 두고 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프랑스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대중들은 기아나의 수감된 반체제 인사
및 죄수들 상당수가 열악한 형 속에서
개주금 당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말았습니다 결국 여론에 못이긴 프랑스
당국은 1938년에러 새로운 죄수의
이송을 완전히 금지하였고 기아나의
교도소는 1946년이다 완전히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차 대전
시기를 지나며 골드러시로 인한 성장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고 설상가상
죄수들의 공짜 노동력 마저 잃어버린
기아나 대규모 농장들이 죄다 무너지고
몇몇 금광에 몰빵되어 있는 경제
구조로 인해 재정적으로 프랑스 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비슷한시기 영국령 기아 와 네덜란드령
기아나 즉 가이아나 수리남이 설탕
커피 등의 농업과 보크사이트 체구를
중심으로 한 광업을 통해 그나마 나은
경제력을 갖고 있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던 것이죠 또한 당시
가이아나의 인구는 약 38만 명 수리
남은 20만 명으로서 상당한 규모를
형성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아직
여전히 식민지이긴 했지만 두지 모두
영국과 네덜란드의 감독하에 각각
제한적인 자치정부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실체를 통해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
의식 또한 계속해서 키워나갈 수
있었죠 반면 프랑스령 기아나
오스트리아 정도의 면적에도 불구하고
만도 안 되는 인구로 인해 그 희박한
인원들 간의 정치 경제적 자립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자 족
수중의 농업과 몇몇 금광으로 전전해야
하는 기아나의 주민들은 오히려
프랑스의 지원에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가이아나 수리남의
주민들이 각자의 국가의 정부를 향해
더 나은 정치적 권리를 요구해 나가는
동안 프랑스령 기아나 프랑스의 해
영토로 귀속되어 더욱 더 종속적인
관계로 이어져 갔습니다 다만 프랑스는
디아나를 자신들의 명확한 해형
인지하며 우 주센터 설립 재정지원 등
기아나 주민들이 적어도 먹고 살 수는
있는 여건을 제공해 주었고 투표권
부여 키아나를 대표하는 의원직 설립
등 공식적으로 기아나의 주민들 또한
프랑스인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할 수
있는 정책을 펼쳐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가이아나 영국 정부와 수리남이
네덜란드 정보와의 협상으로 각각
1966년과 1975년에 독립을
선포한 이후로도 프랑스령 기아나
계속해서 프랑스의 영토로 남아 있게
되었죠 그리고이를 다행으로 봐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가이 아나가 독립
이후 인도와 아프리카계 주민간의 오랜
기간 정치적 대립과 억압을 겪고
수리남 그래는 과거 아프리카
노예신분에서 탈출했던 이들의 후손들이
90년대까지 정부군과 내전을 버리는
동안 프랑스랑 기아나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이며 오히려 90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유럽연합에 프랑스로
편입되어 주변 국가들을 압도하는 생활
수준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브라질 아이 수리남 등 정치 경제적
위기를 겪는 국가들로부터 수많은 이주
행렬이 이어졌고 60년대만 해도
3만에 불과했던 기아나의 인구는
2000년대에 들어설 무렵엔 약
20만 오늘날 날 2020년도에는 약
30만에 달하는 인구 규모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물론 기아나의 경제적
상황은 주변 국가들의 비해서 나은
상황이란 것이고 험난한 지역들로 인해
기아 아는 오늘날까지도 해안 지형
외에 제대로 된 인파라 건설을 이루지
못한 상태입니다 또한 우주 센터를
제외하고는 산업적 기반이 전무하기
지역내 실업률은 20% 달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아직까지도
기아나의 주민들은 프랑스와 유럽연합의
재정적 지원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이러한 재정적 종속 관계는 기아나
주민들의 독립을 불가능하게 하는 가장
큰 요소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례로
2010년에 벌어졌던 자치권의 대한
국민 투표에서 기아나 주민들은 나쿠
den 인프라를 개선해 주지 않은
프랑스에 불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거 반대표를 던지며 프랑스에 남는
것을 선택했죠 이렇게 기아나
2020년대 있 오늘날까지도 본토와의
언어 및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공식적인 영토로 공고에
유지되고 있고 프랑스와의 이러한
관계는 앞으로도 오랜 기간 이어질
것으로 보여집니다 아무튼 프랑스랑
기아나 21세기에 들어서도 가이아나
수리남의 경제력을 압도적으로 상해하며
비록 독립국을 아니지만 세계의 기아나
중에 가장 생활 수익이 높은 지역으로
자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존은 2020년 대까지 그대로
이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가이아나에서
2015년에 막대한 양의 석유가
발견되기 이전까지는 말이죠 다음
영상은 가이아나의 석유 발견 그리고
베네수엘라와 영토 분쟁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지식한잔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