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미스터리를 해독한 신비의 비석 '로제타 스톤'의 숨겨진 이야기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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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된 비석은, 그야말로 기적의 존재였습니다.
#미스터리 #이집트 #역사
이집트 문자들은 종종 글자가 아니라
전체 단어를 표현하며 이러한 단어들은
때로는 그림으로 때로는 임의의 기호로
표현된다 나일강이 거대한 강은 아마존
강에 의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기다란
길이를 자랑합니다 아시아 다음가는
크기를 지낸 아프리카 대륙의 절반
가까이 그 줄기가 뻗어 있을
정도인데요 나일강의 존재는 과거부터
해당 지역의 원주민들에게 있어 커다란
축복이었고 이로부터 아프리카는 우기인
겨울을 빼면 비가 거의 오지 않아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나일강은 호우가 찾은
열대 지역이 상위의 위치해 있어
언제나 강문을 넘실 거였는데요이는
필연적으로 날강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들도록 만들었죠 사람은 가족을 만들고
가족은 마을이 되었고 마을은 부족으로
발전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백만
년 전 이집트 지역에 정착해 구석기의
들어선 정착민들은 시간이 흐르자 기존
의 수렵과 채집에서 벗어나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요 나일강의 특성과
그로 인해 생긴 결과물들은 이들에게
커다란 축복이 되어주었죠 나일 강에는
백나일 강과 청나일강 두 가지의
커다란 지류가 존재합니다이 중 청나일
강은 아프리카 대력 눈을 볼 수 있는
몇안되는 지역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발언하는데 봄이 되면 고원의 사인
대량의 눈이 노가 겨울 동안 내린
비와 합쳐져 강물을 넘치게 만들죠
정기적으로 일어나는이 범람은 비옥한
부식토 기타 영양소들을 하류 연안에
가져와 매년 농사에 적합한 땅을
새롭게 만들어냅니다 나일강의 범람은
풍요를 약속하는 하피 어신의 축복이다
초보적인 농업 기술로도 막대한 작물
수확량을 가능케 만드는이 현상은
정착민들의 인구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는데이는 이래 없이 빠른
속도로 이집트 문명이 탄생 발전하는
계기가 되죠 다른 지역의 농부들이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가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나일강의 농부들은
단순히 시야만 뿌리는 것만으로도 곡물
창고를 을 가득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겨난 농부들의 여유 시간과
앞서 설명한 나일강의 정기적인 범람은
이집트 문명이 발전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는데요 먼저 피라미드와 같은
국가주도 대규모 프로젝트에 투입
가능한 여유 인력과 자본을 충당할 수
있게 되었죠 또 강의 범람을 계산해
효율적인 농사를 짓기 위해 천문학
역학 수학 등의 각종 학문들이
태동하게 됩니다 1년이
365.25일이라는 것을 알아낸 고대
이집트인들은 일주일을 10일로 한 을
30일로 개선했고 마지막 12월은
5일을 더해 두었는데요 나일강이
범람하는 시기인 아케트 농사를 짓는
시기인 페레트 수학을 하는 시기인
시무 이렇게 계절로 한해를 나누기도
했죠 날 강의 범람으로 토지를 재
측정하는 과정에서 기하학과 적분이
발전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거대한
도시가 세워졌고 고유의 문화를
향해하는 문명인들이 살아가기
시작했는데요 국가의 체계가 잡히기
시작하자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죠
사람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다 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얼마만큼 일을
했는지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보상을
주었는지에 대해 감독관들이 전부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는데 즉
언어를 기록할 필요성이 생겨난
것이었죠 그렇게 기원전 3천년 초반
탄생한 이집트 상형 문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겪게
됩니다 사물의 형태를 그대로 본떠
만든 원시적인 구조였던 초기 당대
사람들은 문자에 신들의 힘과 지혜가
담겨 있다고 믿었는데요 일명 신성한
글귀 즉 히에로글리프 혹은 신성
문자라고 불리는 상형 문자는 왕이나
신관 혹은 귀족과 서기 정도의 고의
계층만 읽고 쓸 수 있었기에 믿음은
더욱 굳건해졌다 문자를 통한 기록이
힘입어 가속화된 문명의 발전은
국가주도 건설 사업의 규모를 더더욱
키우는 한편 인권에 대한 개념까지
체계화 하게 됩니다 기원전 2005년
경에 이르자 오늘날의 풍경과 별다를
바 없는 생활상이 나타날 정도였는데요
피라미드 건설 사업에 투입된 인부들은
하루 8시간 노동 을 마치고 퇴근에
맥주와 고기로 배를 채우는가 하면
개인 사유로 휴가를내는 경우까지
있었죠 석기들은 예전보다 더욱
업무량이 늘어나게 되었고 일일이
히에로 글리프를 작성하는데 커다란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24세기 경부터 석기들은 공식 기록이
아닌 기타 정부 문서나 행정 업무를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 상형 문제를
간소화한 신관 문제를 사용하게
되는데요 이번 달은 분명 21을
출근했는데 월급이 왜 이것밖에 안
되는 겁니까 여기 적어 뒀었는데 어
여기 봐 나크 t 자네 17일에 배가
아프다면서 빠졌었지 아 오늘날의
필기체와 같이 빠르게 흘겨 쓴 것이
특징인 신관 문자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년의 과정들을 통해 일반 시민들
사이에도 빠르게 퍼져 나갔죠 문맹률은
놀라운 속도로 줄어들었고 일반
시민들은 신관 문제를 더더욱 간소화해
사용하기 편하게 만든 민중 문자를
만들어 내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무려
3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집트 상
문자는 다양한 형태로 이집트 전역에서
사용되는데요 찬란하게 꽃피운 이집트
문명과 함께 세계 곳곳으로 전파된
상형 문자는 한자나 한글 정도의 몇몇
문자를 제외한 모든 문자들의 조상이
되었으며 외과 수술을 통해 종양을
제거할 정도의 의하 어마어마한 외부
자금을 유입시킨 해상 무역 놀랍도록
세련된 예술품들은 당대 이집트의
부강함의 쉬 짐작해 했죠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그 어떤 강대국이라
쇠하고 만들었고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지 못한이 는 속국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에 거대의
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 제국에게 감히
적수가 없어 보였는데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에 불과했죠
기원전 356년 7월 마케도니아
왕국의 수도 펠라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폐하 승전 보입니다
전쟁에서 마케도니아가 승리했습니다
폐하 경축드립니다 올림피아 제전에서
에마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이세는 자신
신의 아들이 탄생함 동시에 낭보가
연달아 들어옴에 크게 기뻐하며이
아이는 결코 패배하지 않으리라고
선언했는데요 놀랍게도 그 선언은
현실이 되었죠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삼은 알렉산드로스는 야망으로
가득찬 청년으로 무럭무럭 성장했습니다
왕자 시절 아버지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정복할
땅이 적어지고 있다라며 안타까워할
정도였는데요 동성연인 관계에
남성들로만 구성되어 강력한 연대를
보여주었던 태배 최대의 정예부대 신성
부대를 16살의 어린 나이에 무찌르는
등 군사적 재능 역시 비범했던
아버지인 필리포스 왕이 암살 당하며
20살에 젊은 왕이 된 알렉산드로스
3세는 즉위하자마자 수많은 반란군을
마주하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믿기지
않은 무력을 과시하며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 반란군을 모조에 격퇴하는데
성공하는데 그 이후 시작된 정복
전쟁은 신화 속에 영웅담을 방불케
했죠 한 마리의 사제의 지위를 받는
양의 군대가 한 마리 양해 지의
를받는 사제의 군대보다 두렵다 병력의
열쇠를 극복하기 위해 왕인 자기
자신이 직접 세기 진영을 갖춘
기병대의 최선 뒤에 서서 싸운다는
대담한 방법을 선택한 알렉산드로스는
수많은 전투 속에서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마케도니아를 승리로
인도합니다 모든 공격이 집중되는 맨
앞에 서서 빗발치는 화살을 피하고
덤벼드는 맹장을 베어 넘기면서 동시에
전항을 파악해 적재 적수에 지시를
내리는 알렉산드로스는 그야말로 전쟁의
신과 다름이 없었는데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 알렉산드로스는 정복한 영토를
귀 합해 거대한 헬레니즘 제국을
건설했지만 종말을 불러오고 맙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당대 이집트인들은 알렉산드로스
삼세를 해방자로 여겼는데 이집트
시와의 신전에서 알렉산드로스에게
당신은 필리포스 이세의 아들이 아닌
아문 즉 제우스의 아들이다 신탁을
내려 줬을 정도였죠 그 씨이 신탁에
몹시 기뻐하며 기념 주화를 발행했을
정도로 헬레니즘 제국과 이집트인들의
관계는 제법 좋은 편이었습니다
문제는이 때문에 이집트인들이 헬레니즘
문화에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동화되었다 것인데요 알렉산드로스
3세가 32세의 나이에 사망하며
헬레니즘 제국이 분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죠 시민들은 이집트 상형
문자 대신 그리스 문자를 기반으로 한
코트 문자를 점점 더 많이 사용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문자가 이집트 상형
문자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이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인데요 시민들이 주로 사용하였던
민중 문자는 콥트 문자에 몇자
포함되는 식으로 어느 정도 보존될 수
있었지만 극소수의 상위 계층만이
사용하였던 히에로 클리프는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소실되기 시작했죠
수많은 단어들이 문장들이 표현들이
사라져 갔습니다 100년도 지나지
않아 이집트 상형 문제는 대부분이
소실되고 많는데요 엎침 the
덮친격으로 프톨레 마오스 왕조에 이어
이집트를 통치하기 시작한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되죠 우상
숭배를 그만한 기독교의 교리에 따라
로마는 신전들을 폐쇄하는 한편 상형
문자들이 기록된 신상들을 파괴
훼손합니다 그렇게 394 새겨진
이집트 상형문자 비문을 마지막으로
3,500년 가까운 역사가 끝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한때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통해 사용되었던 이집트
상형 문제는 이제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문제로 전락하고 말았죠 641
년 동로마 제국을 공격해 이집트를
정복하는데 성공한 이슬람 제국의
학자들은 이집트 상형 문자를 발견하고
크게 놀라워합니다 이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각종 문헌들을 바탕으로
상형문자 해독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는데요 상형 문자의 특성상 글자
하나하나가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지
파악해야만 하는데다 글자의 수 자체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죠 워낙에
오랫동안 쓰였던 문자였습니다 철저한
우상 파괴에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양의 유물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천년간 수많은 학자들이
상형문자 해독에 도전했지만 모조리
실패하고 마는데요 어딘가에서 마법과도
같은 고대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한
해독은 사실상 불가능했죠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으로부터
2,0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프랑스 왕국의 코르시카에서 한 남자가
태어납니다 그의 이름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변두리 출신의 하급 교직에
불과한 아버지를 둔 그였지만 야만과
카리스마 만큼은 알렉산드로스 세와
비견할 만 했는데요 개인의 무력은 썩
좋지 못했지 만 전술에 관해서는 인류
역사를 모두 통틀어도 나폴레옹 만한
자가 없을 정도였죠 23세의 나이에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해 장군으로
진급한 나폴레옹은 계속해서 전공을
쌓아 나갔고 이탈리아 원정의
사령관으로서 벨기에와 이탈리아 북부를
프랑스의 품에 안기는 대활약을 합니다
1798년 프랑스 내부에서 커다란
인기를 얻게 된 나폴레옹을 견제할 겸
자금 충당할 위해 프랑스 정부는
나폴레옹을 이집트로 출격시키는
이집트를 정부 해 영국과 인도의
교류를 차단하고자 했던 나폴레옹은
흔쾌히 명령을 받아들였죠이 소식은
프랑스의 과학예술 위원회에 소속된
학자들을 크게
흥분시켰던 건축된 거대 구조물과 그
속에 감춰진 수많은 보물들은 학자들의
심장을 뛰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총
167명의 회원 중 16명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대에 합류하게 되는데요 나폴레옹은
공학자 수학자 지리학자 통역사 작가
건축가 의 다양한 직업으로 이루어진
이들 회원을 군대처럼 다섯 개
병정으로 재편성한 후 실제 계급까지
부여했으며 학자들은 문헌 속에서만
보았던 고대 이집트를 실제로 연구할
생각에 잠까지 설쳤어 그리고 기대를
한참 뛰어넘는 놀라운 유물이
이집트에서 발견됩니다 제군들 수천년의
역사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앞서
말했듯 나폴레옹의 지략과 군사적
능력은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했는데
정애 중에 정의만을 끌어모은 최강의
기마병 맘루크 기병 만 천기의 더해
아랍 기병 8천개 예니체리 부병 2만
명을 상대로 승리한 3만 명의
프랑스군 사상자는 단 300명이
불과했다고 하죠 그런데 순조롭게
마무리될 것 같았던 이집트 원정에
커다란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프랑스와 끈끈한 동맹 관계였는데
때문에 나폴레옹은 이집트 정복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당시 오스만
제국의 손해 멸망했으면 여전히
이집트에서 기대권을 차지하고 있던
맘루크 겨냥했고 오스만 제국 술탄의
명예에 따라 맘루크의 학장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집트 민중들을
해방시키다 동시에 외무 대신 탈레랑게
오스만 술탄의 양해를 구할 것을
부탁해 두었지만 탈레랑 men
나폴레옹의 요구가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데
그곳을 공격해 프랑스에 지배하에
둔다는 것은 사실상 선전 보고나
다람이 없었기 때문인데요 그의
생각대로 나폴레옹의 침공에 황당함을
넘어 커다한 분노를 느낀 오스만
제국은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등의
여러 나라가 소속된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하게 되죠 한 순간에 수세에 몰린
나폴레옹은 요새의 방어를 강화해
공격에 대비할 것을 각 지휘관들에게
명령하게 됩니다 1799년 7월
15일 이집트의 한구 도시 로제타
근처에 피에르 프랑스와 부샤르 중인은
명령에 따라 약 300년 전에
건설되었다고 알려진 오래된 맘루크
요새를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보수하고 있었는데요 그때 내부의 벽을
철거하던 군인들이 무엇인가가 빼곡하게
그려진 수상한 도를 발견했죠 대학에서
철학과 수학을 전공한 후 군생활을
시작한 피에르 중이는 지위 임무에
더불어 이집트의 공예학 기술을
조사하라는 임무를 수행 중에
있었습니다 그는 병사가 발견한 돌이
비석이 동시에 아주 중요한 유물임을
직감했는데 곧바로 로제타의 발견된
비서 즉 로제타 스톤의 존재를 상부에
보고한 중위는 전쟁 토임 이렇게도
비석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데
성공했죠 한편 이집트 원정군의 상황은
시식 각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넬슨 제독이 프랑스 해군을 선별하며
병력이 완전히 고립된데 이어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탈출해 프랑스로
돌아가 버렸던 것인데요이는 전쟁이
장기화되며 프랑스 본국에서 자신의
입지가 시시 각각 좁아지고 있음을
의식한 나폴레옹이 더 시간이 끌리기
전에 귀국해 쿠데타를 일으키는게
낫다고 판단한 탓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은 쿠데타의 성공하며 프랑스의
전권을 잡게 되었지만 이집트에 남겨진
원정군은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 세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사실상 알아서 항복하라는 의미가 담긴
인수인계의 사항만을 남기고 떠났기
때문이었는데요 지휘권을 넘겨받은
클레베르 장군은 망설이지 않고 항복
협상을 시작했죠이 소식을 전해들은
프랑스의 학자들 역시 조급해졌습니다
영국 놈들은 분명 있는 걸 다 내놓고
떠나라고 할게 분명해 1800년 광
예술 위원회 회원 중 인쇄업자이자
언어 학자였던 장 조세 마르셀은 현대
연필의 창시자인 니콜라 자크 콩테와
힘을 합쳐 로제타스톤을 인쇄판 그
자체로 쓰는 방법을 고안해 내는데요
성공적으로 현재에서 로제타 스톤을
복사해 낸 학자들은 샤를 프랑스와
대구와 장군의 도움으로 탁본을
8회까지 운반해 냈죠 학자들의 우려는
정확했습니다 항복 조항 16조
프랑스를 위해 제작된 사본 조각상 및
기타 수집품은 공공 재산으로 간주되며
연합군 장군의 처분을 받는다
이집트에서 수집한 각종 유물들에
더불어 그 복사본 아지도 소유권을
이전할 것을 영국이 항복 조건으로
내걸었던 것인데요 비교 해부학을
확립한 프랑스의 박물학자 에티엔
조프르 생틸레르 이걸 영국에게 넘기니
파괴하는 편이 낫다라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죠 이에 영국의 학자들은 유물의
파괴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군을
설득했습니다 영국의 육군장교 존 헬리
허친슨 또한 자연사 표본 같은 품목이
학자들의 사유재산으로 간주된다는데
동의한다며 프랑스 학자들을
받았네 자의 위대한 발견을 내가 딱
한 번만 봐도
괜찮을까 그것참 영국군에게 비밀이
영국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로제타
스톤이 카페트 밑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파악한 영국군은 본국으로
유물들을 수송하는 임무를 맡은 톰킨스
터너 대령을 시켜 강제로 로제타
스톤을 회수했습니다 진흙탕을 방불케
하는 싸움 끝에 로제타 스톤은 영국의
손에 넘어갔는데요 프랑스 학자들은
탁본이 미리 빼돌리기 잘했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죠
본과 탁본이 각기 영국과 프랑스로
전해졌음 학자들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1년이 지나서야 맨
아래쪽의 글자들이 헬레니즘 시대의
공식 문서에서 사용되었던 고대
그리스라는 사실을 밝혀내는게
고작이었는데 고대 그리스어는
학자들에게 잘 알려진 고대오 중
하나였지만 포토레 마이오스 왕조
치아의 이집트에서 정부 공식문서로
사용되던 고대 그리스어는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점이 있어 한번에
알아보기 어려웠던 탓이었습니다
1802년 4월 영국의 골동품 가이자
작가였던 스티븐 웨스턴이 고고학자
협의 회의에서 로제타 스톤의 영어
번역본을 발표하는데 성공하며 비석의
대략적인 내용이 밝혀지게 됩니다
신들에게 사랑받는 왕 남과 북의 제왕
네테루 메루이 아투이 아오와 세프 앤
푸타 우스르 카라 앙크 세케 아멘
이시니 곧 스스로 현신하다 푸타로부터
사랑받는 자 영원한 자 태양
프톨레마이오스의 아들이라 그는 신과
같으니 바로 신의 아들이며 여신이
그를 내려 주셨노라 그는 곧 살아계신
호루스이며 이시스의 아들이고
오시리스의 아들 오시리스의 복수자
일지어니 그를 찬양하라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업적과 더불어 그가 신관들게
베푼 후원을 각종 미사 여구를 동원해
찬양하는 글이었던 것인데요 오른쪽
모서리가 소실되었고 일부 불명확한
부분이 있어 완전한 해석은
불가능했지만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였고 로제타 스톤의 정체는 이제
명확해졌습니다 신관들이 치매를 기울여
쓴 차량문을 다양한 계층에 읽을 수
있도록 총 세 가지 언어로 적어둔
기념물이 있던 것인데요 기원전
196년 경 만들어져 사원 내부에
전시되었을이 유물이 다른 두 가지의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기적의
열쇠라는 것을 알게 된 학자들은
로제타 스톤을 해석하기 위해 저마다
달려 들었죠 하지만 중간 부분과
윗부분에 적힌 문자는 해석은 커녕
정확한 정체조차 파악이 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앙투안
이사 실베스트르 드 사시와 스웨덴의
외교관 자 학자인 요한 데이비드
아케르 블라드 역시 탁본을 눈앞에
두고 고민에 빠져 있었는데요 요한
아케르 블라드는 로제타 스톤에 적힌
문자가 코트 문자에 변형된 형태라고
확신했지만이는 민중 문자가 코트
문자에 일부 남아 있었기에 발생한
오해였지만 앙투안의 직감은
정확했습니다 그는 가운데 부근의
문자들이 그리스식 이름과 어딘가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했는데요 앙투안은
보통 이름을 적을 때에는 알파벳
순으로 적는다는 것에 차안에 로제타
스톤에서 전형적인 그 수식 이름들을
찾아내려 했었죠 그리고 총 다섯 개의
이름을 식별해 내는데 성공하며이를
토대로 29개 문자를 해독해 냈다고
보고합니다 놀랍게도 절반 이상의
정확한 해독이 있는데요 하지만 수년
간의 추가 연구 끝에도 가운데의
문자가 민중 문자이며 위쪽의 문자가
이집트 상형 문자라는 사실만이
밝혀졌을뿐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고
앙투안은 로제타 스톤의 연구를
포기하게 되죠 1811년 앙투안은
우연히 중국 학생과 한자에 대한
토론을 하다 상형 문자는 특정한
음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한자는 외래어를
표현하기 위해 뜻을 버리고 소리만을
활용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서 차가는
것인데요 영국의 의사이자 고고학자인
토마스 영에게 로제타 스톤에 관한
편지를 받은 앙투안은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토마스 영에게
공유했지만 토마스 영은 로제타 스톤에
새겨진 상형 문자와 일전에 앙이
발견했던 민중 문자의 이름 중 하나가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추가
조사를 통해 총 80개의 일치점을
찾아낸 토마스 영은 상형문자와
민중문자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밝혀 냈는데요 상형 문자 중
타원형의 테두리와 새로 선에 둘러싸인
문자들 일며 카르투슈 집중한 그는
이것이 중요 인물의 이름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라고 추측했고 앞선 앙투안의
발견을 통해이 중 하나가 포토레
마이오라 글자라고 생각한 토마스 영은
각각의 상형 문자에 그리스어를 한
글자씩 대입시켜서 기초적인 상형 문자
해독에 성공합니다 이집트 상형 문자는
미적인 이유로 하나의 문자를 위아래로
함께 배치하기도 하여 해독의 난해함이
더해졌지만 그의 천재적인 두뇌는
이마저도 해독해 냈는데요 비록 두
개의 카르 투시에 들어 있는 13개의
상형 문자 중 절반 정도밖에 찾아내지
못했지만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진보였다
토마스 영은 로제타 스톤 해석을
자신의 연구 분야라 생각하지 않고
단순한 오락 정도로 치부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제타 스톤의 관심을
잃어버 버린 그는 1814년 고대
이집트에 관련된 학술지를 저술한
프랑스의 언어학자 장 프랑스와
샹폴리옹게 관련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발송함으로써 인수인계를 마쳤는데요
라틴어 그리스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콥트어 등 어지간한 고전어을 모조리
습득하고 있던 샹폴리옹은 토마스 영의
발견을 참고로 로제트 연구에
매달렸지만 다른 카르투슈 해석할 수
있었을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죠 시간은 빠르게 흘러 1822년
샹폴리옹은 기원전 2세기에 이집트
필레이 세워진 필레 오벨리스크를 보고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프톨레 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 3세에 대한 내용이
상형문자로 적혀 있는이 오래된
오벨리스크에 새로운 카르 투수가 적혀
있었는데요 그 중 뒤쪽의 글자는 이미
그가 해독해 낸 것이었죠 이때
샹폴리옹은 콥트어 지식이 빛을
바랬습니다 일반적으로 태양을 묘사할
때는 동그란 원을 그리기 마련이야
그렇다면 이건 그는 코트 에서 태양을
나타내는 라가이 카르 투스의 첫 번째
글자라고 직감했는데
R 가운데에 있는 정체불명의 상형
문자가 어떤 음절에 대응하는지 아주
뻔했죠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라오 람세스 바로 애였고 이용은
2년간의 연구를 통해 이집트 상형
문자들을 해독해 내는데 성공합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상형 문자를 단순히
뜻을 나타내는 것뿐만이 아닌 소리
글자로도 활용했던 것인데요 예를 들어
새가 그 진 상형 문자는 새 혹은
이집트 지혜의신 토트를 의미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토트라 소리 그
자체로도 기능했던 거죠 이집트 상형
문자와 고대 그리스 글자가 모두
해독되지 가운데 줄의 민중 문자 역시
함께 해독이 가능해졌습니다이를 통해
로제타 스톤의 소실된 부분을 각
문자들이 서로 보완해 주는 식으로
전체적인 내용이 해석될 수
있었는데요이 비문은 단단한 비석에
히에로글리프
민중문자 그리스어로 새겨질 것이다
기원전 기록된 비문이 수십 세기를
뛰어넘어 다시금 되살아 났죠 로제타
스톤을 통해 천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그 누구도 해독해 내지 못한
이집트 상형 문자가 완벽히
해독되지이를 토대로 기존의 유물들에
적힌 수많은 상형 문자들 역시도 그
비밀이 풀리며 관련 학문에 커다란
발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한편 독립에
성공한 이집트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는데요 수많은 유물들이 마치
공공제 럼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
강대국들의 박물관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죠 특히 런던의 대형 박물관에
보관된 로제타 스톤은 이집트 입장에서
반드시 반환되어야 할
보물이었다 비슷했는데요 파르테논
신전에서 출토된 고대 그리스 조각품
엘긴 마블 등의 여러 그리스 유물들이
대형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리스와 이집트는 정부
차원에서 자신들의 유물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영국은이 귀중한 보물들을
원래 주인에게 반환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들 정부가 돌려보고 자
하는 유물들은 대형 박물관에 수백만
점에 달하는 전시품 중에서도 간판급
스타였네요 박물관은 이에 더불어 해당
유물들의 반환이 약탈이나 매입을 통해
습득한 수많은 전시품들을 모조리
반환하게 되는 계기가 될까 두려워했고
이것은 다른 강대국들의 박물관 역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물들은 인류
전체에게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마땅히 보존되어야 한다 따라서이를
정치적 욕심으로 회수하려 해선 안
된다 박물관은 한 국가의 시민 뿐만이
아닌 모든 국가의 봉사 하는 기간이다
2002년 10월 대형 박물관 루브루
박물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에르미타주
박물관 베를린 국립 박물관이 포함된
세계 30여개의 주요 박물관들이 유물
반환 거부 성명을 발표하는데요
안타깝게도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는
초라한 사진을 전시하는 것으로 로제타
스톤을 대신해야만 했죠 로제타 스톤
일류에 찬란했던 역사를 다시 한번
읽어 내려가게 해주었던이 귀중한
비석은 지금도 런던 대형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기묘한 밤이었습니다
[음악]
[박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