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강) 자유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 이승만(6) 자유를 선포하러 고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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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수용 올림 -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환경적 세계관으로 알리고 전하는
대한역사문화원에
한국 근현대사 바로 알기 특강입니다
자유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
여섯 번째
이야기
자유를 선포하러
고국으로 돌아온 이승만의 이야기입니다
프린스턴 졸업을 앞둔 1910년 2월
16일 이승만은
서울에 있던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당시
언더우드 선교사는
종합대학 설립을 준비 중이었는데
이승만에게 우리는 당신을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귀국하면 알맞은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며
앞으로 세워질 대학의 교수직을 제안한
것입니다 이승만은
4월 9일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이렇게
답장했습니다
제가 두 달 후면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봤습니다
그러면 선교사님이 세우려고 하는
기독교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싶습니다
미국에서 배운 국제법
국가론 정부론
역사
근세 유럽사 미국사 미국 헌법
서양 철학
종교 같은 정치학 과목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가르치고 싶습니다
조선은 지금 일본의 식민지가 다
되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제가
한국에서
교수 생활하는 것을 방해하면
선교사님이 만드는 학교에서
교수 생활하는 것을 포기하고 전국을
다니며 부흥사가 되어 불쌍한 영혼을
기독교인으로 만드는데 일생을 바치고
싶습니다
박사학위를 받기 전 이미 이승만은
대한제국으로
돌아와 할 일들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유학을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목표는
초지일간 대안의 독립을 위해
대한제국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승만 박사의 아버지 이경선
옹은 이승만 박사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아들이
돌아온다면
지난 날과 같은
고통을
겪을 것 같았기 때문이죠
그러나 개일 선교사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는 이승만에게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대한제국을 깨워야
한다는 사명감을
심어주었습니다
만약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 머물렀다면
얼마든지 좋은 직업과 명예 그리고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백성으로서
책임감을 가지는 것 그래서 그는
기꺼이 자신의 조국을 위해
헌신하려
돌아올 준비를 한 것이죠
1910년
6월
프린스턴 졸업식에서
박사학위를 봤던 날 이승만은
망하기 직전인 대한제국을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대뇌였습니다 나의
준비 기간은 끝났는데 나는
깊은 슬픔을 느낀다 내가 가서 일해야
할 대한제국은 이제 나의 나라가 아닌
것을 내
정말 그랬습니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모든 권리를 빼앗기는
경술국치의 수모를 겪으며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고 일제
식민통치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승만이 조지 워싱턴 대학의 입학하던
해
고종은 을사조약으로 나라를 팔았고
5년 후 이승만이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두 달이
지난 8월 29일
내용의 아들 순종은
백성들에게 나라를 일본 천황 폐악기에
이양하니 소란 떨지 말고
복종하라고 말하며 그 어떤 한 거도
없이 일본에게 나라를 넘겨주었고
대한제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왕실은 일본 천황가의 일원이 되어
일본이 망할 때까지 일본 돈으로
호사를 누렸죠 그런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이승만 박사는 길을 나섰습니다
고국을 떠난지 약 6년 만에 나라를
되찾기 위해 배움에 몰두했던 이승만
박사는 그 목표를 달성하고 미국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한일합방
5일 후인 1910년 9월 3일
뉴욕항에서
발티코를 타고 영국
리버풀로 향했습니다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만주를지나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대한제국의
관리가 아닌 일본 경찰에게 입국
심사를 받는 자신과 동포들을 보며
나라 잃은 설움을 실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910년 10월 10일
고국을 떠난지
5년 11개월 6일 만에 일본의
식민지가 된
서울에 돌아왔습니다
서울에 돌아온 이승만 박사는
서울
황성기독 청년회
즉 ymca에서 사역을 시작합니다
이곳에는 한성 과목 동지 이상재와
김정식 유성준
홍제기 등이 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승만 박사가 한성감옥에서
복음을 전해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었죠이
박사가 귀국하기 전
언더우드 선교사는
앞으로 설립될
기독교대학의 교수직을 제의했고 개일
선교사와 존 모트 선교사는
서울 ymca에서 일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 선교사가 시작하려는
기독교대학의 인가가 늦어지면서 이승만
박사는 개일 선교사와 존 모트
선교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YMCA 한국인 총무와
ymca의 학생부 간사 그리고
YMCA 청년학교
학감으로 일하게 된 것입니다
이 박사가
YMCA 총무직을 수락한 이유 중
하나는
국제단체인 YMCA 보호 속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서울 ymca는
애국청년 지사들의 집결 지었고 마치
제2의 독립협회처럼
옛 동지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가장
핫한 인물 미국 박사 이승만이
가담하면서
서울 ymca는 미국 유럽 일본
ymca와 연결되어 일본 총독부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막강한 국제 기독교 조직이 되어
있었죠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아닐까요
YMCA 청년학교는 중고등학교 과정과
대학 과정을 포함한 학교였습니다
이곳에서 이승만 박사는
청소년 그리고
청년들에게
기독교 세계관을 기초로 한 자유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주일이면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성경 연구반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외부에 나가
강의나 강연을 했습니다 또한
전국적으로
YMCA 지부를 세우는 일에 공을
들였고 선교사들의 좋은 설교나 글
그리고
성경공부 교재를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이 일들을
그리 길게 이어가지는 못했습니다이
박사의 조선 사역은
1910년 10월부터
1912년 3월까지
약 1년 5개월 동안 뿐이었습니다
1년
5개월 동안 이승만 박사가 한 일들을
살펴볼까요
이승만 박사가
YMCA 국제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자신의 사형 내용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나는 안식일 때마다 바깥
교회에 나가서 설교하는 일과 오후에
바이블 클래스 지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한편으로 나는 청년의 학교에서 주
9시간에서 12시간의 강의를 합니다
다른 학교에 나가서 수시로 하는 짧은
강의 외에도
청년의 학교 생도들만을 위한 주
3회의 특강을 해야 합니다
이승만 박사는
우선 바이블 클래스를 조직하여
성경 강의에
집중했습니다이 박사가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듯 조선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이죠 지금 보는
사진이 바로 바이블 클래스에 모여든
학생들입니다 또한
청년학교 대학부에서
성경과 국제법을 가르쳤는데이
박사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배제
학당 시절
협성의 토론회에서 그랬듯
토요일마다
YMCA 연합 토론회를
빠짐없이 열어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주며
늘 꿈꾸던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 교육에 돌입한 것이죠
모임마다
몰려온 수백 명의 학생들에게 이승만
박사의 행동 하나하나가
화제가 되었습니다이
박사는 모든 공부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냈으며
계단을 오르내리면서도 영어로 혼자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박사의 유머에
매 강의마다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조금만 잘해도
원더풀 중요한 대목마다
굉장히
정말 굉장해라고 추임새를 넣어서이
굉장이란 별명까지 얻었다고
하네요이 박사의 강연과 강의는
청중을 압도하는 설득력이 있어서 마치
교회에 부흥회처럼 그 열기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이승만 박사는 1911년
봄 기차로
2300km 배로
880km 말과 나귀를 타고
424km
우마차로 80km
인력거나 가마를 타고 3.6km
그리고
기차나 배 말과 낙이
우마차나 인력거 등으로 갈 수 없는
길을
11km를 걸으며 전남에서
평안도까지
33회 지폐를 열어
7 1935명의 학생과 청중에게
부흥회를
겸한 강연을 이어갔습니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33개의
YMCA 지부가 탄생하게 되었고 그
33개 지불을 통해
기독교 세계관으로 무장한
조선독립을 위한
청년조직망이 전국적으로
구축되었죠 이승만
박사가 1년 5개월 동안 조선의 외친
메시지는
기독교 세계관을 기초로 한 자유와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독립정신이었습니다
전국적인 집회를 마치고
평양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 1911년
6월
윤치호 선생이 운영했던 개성의
한영서원에서 제2회
기독학생 하령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하령회란
여름에 개최하는 수련회 또는 부흥회를
말합니다
이 하령회에는 전국 각지
서울 광주 전주 군산 개성 선천 등의
21개 기독교 학교에서 모인
93명의 학생 대표와
여러 선교사와 목회자가 참석했습니다
미국인
목사들의 설교로 부흥회가 진행되었고
이승만 박사 역시 주강사 중
하나였습니다 이하령회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경 말씀을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성령의 불이 임하면서 내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독립정신이 일어난 것이죠 이승만
박사가 한성 감옥에서 외치던 거룩한
성도가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그 외침
그대로였습니다
이 화령애를 보고
충격을 받은 일본 총독부는
본격적으로
기독교를 탄압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한영서원 하령의 이후 일본은 이승만
박사를 더 철저히 감시하기 시작했고이
박사의 외부 활동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조선 통치를 시작하면서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초대 총독으로
대라웃지 마사다케를 임명했습니다
데라우치는
교회야말로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항일 집단이며이 집단을 와해시키지
아니하고는
효율적인 조선 통치가
난관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라고
단언했습니다 왜
교회가 조선 통치의 방해가 될까요 그
이유를 이승만 박사는
한국교회 핍박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일본 생각에는
한국 교회는 독립 사상을 배양하는
곳이요
한국 교인들은
장내 혁명을 주창할 자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이
한국 교회를 통제하고
한국 교인들을 다스리기 전에는
장내 화근을 막을 수 없다고
여겼다네
맞습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조선을 바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이
기독교의 가르침대로 변화된 후에는
조선 통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죠 그래서 조선을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제거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일본은 살아있는 천황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 국가입니다
그러므로
천황이 온 세계로부터
존경과 숭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나아가
천황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천왕숭배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죠 또
자유 민주주의 역시
기독교의 아름다운 산물인지라
천왕숭배를 주장하는 일본과 사사건건
부딪히게 되어 있죠 더구나
기독교인이 된 조선 사람은
교회를 통해 하나로 연합하고 그
연합한 무리가 용기를 내서
독립을 찾으려 하니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의 기독교와
기독교의 산물인 자유민주주의는
박멸의 대상일 수밖에요 그래서 일본은
조선에서 기독교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베고인
사건입니다이 사건을 시작으로 일제는
본격적으로 조선 기독교 탄압에
돌입합니다
에고인 사건은
데라우치 암살 모의 사건이라는 일본이
연출한 가짜 뉴스에서 출발합니다
데라웃지 암살 모이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넘어 내륙 깊숙히
진출할 목적으로
철도망을 증설하고 있었습니다
압록강 철교도 바로 그런 목적에서
만들어지고 있었죠
1911년 12월 27일
압록강 철도 기공식이 예정되어
조선총독부
총독 대라웃지가
압록강 철교 기공식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팩트입니다 이제부터
일본의 자작극이 시작됩니다
데라우치가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로 이동할
때
기차가 선천에 정차하면
데라우치를 저격하려 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는 것입니다이 일은
전혀 사실이 아닌 일본의
자극이었습니다 일제는
즉시
데라우치 암살을 모의한 범인을
색출한다며
1911년 11월 11일부터
평안도 일대에 기독교 지도자와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던
신민의 회원
약 700여 명을
잡아들였습니다 그 중 123명이
혐의자로 기소되었고
8개월이 지난
1912년
6월 28일이 되어서야
첫 공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공판 이후
약 20여 회의 재판이 진행되었고
105명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지게
되면서
그렇게 배고인 사건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입니다
수사와 재판은
충분한 조사도 없이 진행되었고 일제의
주장만 인정되는
편파적인
재판이었습니다
일본인이지만 105인 사건에 조선인
측 변호를 맡았던 오쿠보 변호사는
본 사건은
검사가 충분한 조사도 없이 구성한
의심 짙은 사건이며
담당 판사들도 역시
편파적으로 진행하고 있다며
분노를 터트렸습니다
일제는 105인 사건을
데라우치 마사다케 암살 음모 가담자
색출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지만이 사건은 조선 기독교인
특별히
서북지방의 기독교인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 일본에 의한
허위 날조 사건이라는 것이 팩트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기소자 123명 중
98명이 기독교인이었고 유죄 판결을
받은 베고인 중
91명이 기독교인 그리고 전체
123명의 기소자 중
118명이
서북 지역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1911년 개성 한영서원에서 열린 제
2회 학생활영회에 참석한 선천
신성중학교
숭실중학교
서울 경신중학교 등의 학생다수가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고
서북지방에서 활동하던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음모 격려자라는 누명을 씌워 조선에서
쫓아내려 했던 점을 종합해보면
105인 사건은 조선 통치를 강화할
목적으로
항일세력인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한 조작된
허위 날조 사건이
분명합니다
에고인 사건의 화살은 이승만
박사에게로 향했습니다
일제는 이승만 박사에게
예수교의 거대 괴수라는 죄를 씌우고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미와
30만 달러 지금도 30만 달러는 큰
돈인데
당시로는
인생 역전의 기회를 가능케 하는
거금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승만 박사를 노리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고 그만큼 이박사에게
다가온 위험의 크기가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나라가 없으면
복음도 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라라는 중요한 울타리가 있어야
자유롭게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승만 박사가 일본의 표적이 되자
존모트 선교사와 필립 질레트 선교사는
이승만 박사를 체포하려는 일본에게
만약 이승만을 체포하면 전 세계의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겠다며 일본을
압박했습니다 그리고이
박사를 미국 미네아 폴리스에서 열리는
감리교 총회 조선 대표로 보내기로
결정하고
1912년 3월 9일 14기 감리교회
지방
평신도 대표 회의에서 이승만 박사를
조선 대표로 선출하여 조선을
빠져나가도록 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이승만 박사의
33년에 미국 망명 생활이 시작됨과
동시에 대안의 독립을 위해
고독한 싸움을 싸우는
독립운동가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망명이란 주로 정치적인 이유로
자국에서 위협을 받는 사람이
외국으로 피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승만
박사의 망명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한
새로운 길로 들어선 것이었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1912년 3월 26일 그의 나이
37세가 되는
생일 아침
남대문역에서 부산행
9시 35분 기차에 올라
서울을 떠났습니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서
미국으로 가는 여정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912년 3월 27일자
매일 신부는 이승만 박사가 미국으로
떠난 그날을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종로 기독 청년의 소속학교
학감 이승만 씨가 미국에 건너가기
위하여 모처의 청원하고
여행권을 청구하였다는 말은 이미
기재하였거니와 그 여행권의 하부를
승인하였으므로 어제 오전 9시
30분에 남대문발
경부선 열차로 출발하여 미국으로
향하여 갔는데 그 돌아올 기한은
6개월로 예정하였다 그 누가
알았을까요이
6개월에 예정에 미국행이
33년이나 걸리게 될 것을 이승만
박사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조선에
돌아와 꿈에 그리던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 교육에 돌입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에게 허락된 시간은
고작 17개월 뿐이었습니다 하지만이
박사는이 짧은 시간에 엄청난
족적을 남겼습니다
무엇보다 전국의
YMCA 조직망을 만들었고이 조직을
통해서 배출했던 사람들이
후일 3일 운동과
독립운동의 주역들이 된 것이죠
이승만 박사는 이제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
고독한 나그네가 되어 미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음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