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비디오 조회수·2023.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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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main/main.do)
-한국고전종합db (db.itkc.or.kr)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db.history.go.kr/)
-동북아역사넷 (contents.nahf.or.kr/)
-opinion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446
-orumi.egloos.com/v/4744948
-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2&nNewsNumb=002324100015
-동북아역사재단, 『근대 변경의 형성과 변경민의 삶』, 동북아역사재단, 2009
-강석화, 『백두산』, 동북아역사재단, 2019
-강진원 외 9명 저, 『만인만색 역사공작단』, 서해문집, 2021
-동북아역사재단 북방사연구소, 『주제로 보는 조선시대 한중관계사中』, 동북아역사재단, 2020
-박성순. (2014). 間島 영유권 분쟁의 역사적 전개와 전망. 동양학, 56, 73-101.
-배성준. "1880년대 국경회담에서 발견한 간도문제의 ‘불편한’ 진실 : [서평] 김형종(2018), 『1880년대 조선-청 공동감계와 국경회담의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588쪽.." 人文論叢 75.3 (2018): 247-265.
-노계현. 2002. 간도 영유권에 관한 역사적 연구. 한국경제학보(구 연세경제연구), 9(1): 1-25
-은정태 ( Eun Jung Tae ). 2007. 대한제국기 `간도문제`의 추이와 `식민화`. 역사문제연구, 17(0): 93-122
-이명종 ( Myeong Jong Lee ). 2013. 대한제국기 간도영토론의 등장과 종식. 동아시아문화연구, 54(0): 311-344
-이화자. (2009). 대한제국기 영토관과 간도정책의 실시. 전북사학, 35, 139-167.
-하원호."개화기 조선의 간도인식과 정책의 변화."동북아역사논총.14(2006):7-31.
-김택중 ( Taek Joong Kim ). 2010. 19C 말 한중(韓中)국경문제의 발단과 교섭. 한국사상과 문화, 55(0) : 253-277
안녕하세요
역사 랑 놀자 입니다
간혹 온라 이상의 간도는 잃어버린
우리땅 이며 향후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요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간도가 정말
우리 땅이 맞는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간도 분쟁 의 기원은 1712년 에
조선과 청나라가 양국의 국경을 정한
뒤 이를 명문 하기 위해 세운 백두
잔 전개 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백두산 전개에 비해 서쪽은 압록강
동쪽 은 통운 강을 양쪽에 경계로
한다 고 적혀 있는데요
정작 전개 비가 세워 지던 당시 를
포함하여 100년이 훌쩍 넘도록 서로
별 문제 없이 지내 오다가 갑자기
19세기 말해 이 내용을 두고 조선과
청나라 치기 서로 다른 해석을
주장하면서 양국간에 국경 분쟁이
발생한 겁니다 왜냐하면 일단 서초
국경이 압록강이 라는 부분에 대해선
양측이 모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동쪽은 톰 웅 강을 전개로
한다는 부분에 대해 청나라 측은 이
통관이 두만강 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2 망간이 양국의 국경 이라고
주장했던 반면 우리 찍은 톰 웅 강과
두만강 은 다른 강의 며 전개 위에
적힌 통운 강은 송화강 에 한 지류를
의미한다 고 주장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러한 논란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인데요
그렇다면 도대체 어느 쪽의 주장이
맞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선 먼저
백두산 전개 비가 세워 지던 과정
부터 차근차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의 19대 임금 이 숙종이 왕위에
있던 시기인 1710 년에 어느 날
당시 평안도 복부에 위원 군의 살던
조선인들이 산삼을 캐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갖다가 성 나라 사람들과
마주치자 그들을 사야 뉘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인삼을 강탈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여러 번
발생해 썼는데 이번에는 상당히 큰
문제로 불거져 쬲
이에 청나라의 황제 강희재 는 조선과
청나라 양국의 국경 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으로 보았고 이참에 양국의 국경을
확실히 정하고 자 천지 112년 2월
국경 조사를 위해 목 급등 이란 자를
파견하게 따고 조선 측의 통보했습니다
한편 청나라 측의 통보를 받은 조선
조정은 크게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백두 전일 때는 살기가
몹시 불편하여 조선인 거주지가
없었으며 게다가 주변에 방어 시설
역시 백도 선에서 꽤 멀리 떨어진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청나라
치기 이를 꼬투리 잡아 백두산 남쪽의
땅까지 자기를 영토라고 옮기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급박 의 대책
회의에 들어갔고 우리나라는 이전부터
톰 웅 강과 압록강 두 강을 경계로
해 왔으므로 백두산 의 기준으로
압록강과 톰 웅 강 이남의 땅을
반드시 우리 영토로 확보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우게 되죠
그런데 백두 선정 갭이 나오는 통운
간 이란 단어가 여기서도 등장하는데요
이때 언급된 통운 강은 두만강 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송화강 의한 지류를 뜻하는
것이었을까요
먼저 숙종 실록의 1597년 5월
18일 기사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압록강과 두만강 2강의 근원이 모두
백두산 꼭대기 에서 출발하여 동서로
나뉘어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데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개회 아닙니다
이를 통해 당시 조선 측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또한 비변사 등록 의 기록에 따르면
1712년 2월 30일 당시 청나라가
국경 조사를 통보해 오자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조 참의 익 왕좌 숙종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들의 전문 의 이른바 토 문 강
이라 한 것은 곧 중국 음메 두만강
입니다
즉 당시 조선 조정은 토 문단과
두만강을 같은 의미로 인식하고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청나라와의 국경 협의를 앞두고
당시 조선 조정이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언급된 톰 웅 강은
두만강 을 의미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고 알 수 있죠
이후 1712년 4월 29일 목
급등이 이끄는 청나라 대표단 일행이
조선의 도착했습니다
2 조선 측에서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경험이 있는 바꿔 이란 인물을
보내 그를 상대 하도록 했죠 그런데
조선 조정이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목
급등은 국경 협의가 장에서 딱히
꼬투리를 잡으려 하지 않았고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실록의 기록 에 따르면 당시 목
급등이 바꿔 네게
그대가 눈이 2 멸할 경계를 밝게
하는 것 라고 물었는데 바꿔 는 장
100선 3 말에 큰 못이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이 되니 큰 모세 남쪽의
곳 우리나라의 경계 이며 진안에
황제께서 불러 물으셨습니다 도 또한
이러한 내용을 우러러 답했습니다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장백산 은 백두산을 큰 못은
백두산 천지를 뜻하는데요
즉 백두산 의 기준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양국의 경계 라는 겁니다
그리고 목동은 조선 찌게 이러한
주장에 수긍하며 별다른 이의를 제기
하지 않았죠
양국의 국경을 압록강과 두만강 으로
정하기로 양측이 금방 합의를 본
것입니다
이후 청나라 측 대표인 목 급등은
백두산에 올라 가 압록강과 두만강의
수원의 4 핀 뒤 2 강에 분수령 에
백두산 전계 비를 세우게 되죠
지금까지 맥주잔 전개 비가 세워 지던
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는데요
내용을 종합해보면 당시에는 통운 강과
두만강을 같은 의미로 인식하고 있었고
청나라와의 국경 협의 과정에서 우리집
대표인 바꿔 니 압록강과 두만강이
양국의 경계 라고 주장한 것 등을
고려했을 때 전개에 비해 적혀있는
통운 강은 두만강 을 의미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는 전개 b 건립 이후에 벌어진 한
사건에 통해서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국경을 정하는 일이 모두 끝나자 뭐
급 등은 같은 지도 2개를 그린 뒤
하나는 자기가 가져가고 나머지 1개는
조선 측의 주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지목한 두만강의 수원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 중 중간에
지하로 흘러 물에 흐름이 보이지 않는
지점에 목책을 세워 양국의 경계를
명확히 표시 할 것을 요구 있죠
이후 목 급등이 본국으로 돌아가자
조선 측은 목 끅 등의 요구 한대로
사람을 시켜 목책 공사를 시작했는데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하나
발생했습니다
목책 설치를 위해 보급 등의 지목한
물줄기를 쭉 따라 가보니 이 물줄기가
2반 단 이 아닌 송화 강으로
흘러들어 같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실록 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차원의 시켜 함께 가서 살펴 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고 아디를 그름을
따라 거의 30 를 반이 이물에
하루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굴 향해 갔고 두만강
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깊이 9 끝까지 찾아 보려고 한다면
4세 로 보아 장차 오랑캐 두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만약
혹시라도 청나라 사람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앞질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뭐 급등이 본 것이 두만강 으로 흘러
들어가는 거 신주 잘못 알았던 것이니
이는 진실로 경수 란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미 강의수 원이 과연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목각 등이 정한 것임에
핑계로 이 물에다 그대로 평 말에
세운다면 하루는 이미 저들의 땅으로
들어가 향해 간 곳을 알지 못하는
데다가 국경의 1개는 다시 의거 할
때가 없을 것이니 2년 난 초안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뭐 급등이 제대로 살펴 보지도 않고
엉뚱한 곳을 두만강의 수원으로 지목한
뒤 그곳에 전개 비를 세워 국경이
잘못 청해진 겁니다
이 크게 당황한 조선 조정은 급하게
대책회의 에 들어갔는데요
이때 여러가지 의견들이 나왔지만
대체로 이 사실을 청나라 조정의 알릴
경우 북극 등 일행 은 황제에게 견
찍을 받을 것이고 이로 인해 청나라
관리들과 의 관계가 불편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지만
또한 경계를 다시 조사 하려 할 때
청나라 측이 다른 인물을 파견할
것인데
조선의 호의 적인 개조를 보였던 목
급등과 비슷한 성향의 문의 또 올
것이라는 보장도 없으며 오히려 우리
측에 불리하게 끔 경계를 다시 바꾸려
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결국 청나라
측의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잘못
정해진 국경을 자체적으로 수정 하여
이번 일을 조용히 마무리 는데요
백두산 정례회에서 시작된 경계 표시
를 중간에서 방향을 틀어 두만강
쪽으로 연결하는 공사를 시행한 겁니다
이 쩔어 뭐 급등의 실수에 대한 조선
찌게 반응만 보더라도 전개 비의 통운
강은 두만강 을 의미하는 것이었음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전계 배 통운 강의 송화강 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당시 조선 측이 이런 반응을 보일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목 급등에 실수로 국경의 잘못
정해졌다는 것을 알아채 씀에 도 이를
청나라 측에 알리지 않고 덮어버린
당시 조선 조정의 이러한 조치가 은
나 전개 비서 시작되는 물줄기는
송화강 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전개
비의 적혀있는 톰 응당 은 2만 면이
아닌 송 화 광 을 의미하는 거라는
5 회의가 생겨나도록 만든 것이죠
아무튼 전개 비가 세워진 이후로도
풍광과 두만강 은 같은 방에 라는
인식이 계속 되었는데요
우선 경종 실록 천체 회계 12년
12월 1일 기사를 보면 청나라와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았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조선 후기 외교문서 들을
모아놓은 동문회 보이는 조선의 21대
왕 인 영주 재위 33년 에 발생한
조선인들의 불법 월경 사건에 대해
당시 청나라 예 부에서 범인들이
말하는 두만강의 무엇을 가리키는 가
를 묻는 자문을 보내 오자 조선 찌기
이렇게 답변한 것이 확인됩니다
두만강 과 통 운광 의 명칭에 차이에
대해서는 소방의 묵게 일대에서는
두만강 이라고 속칭 하고 있습니다
여러 죄수들이 공술 하면서 지난
두만강 은 바로 대국이 통감 을 치
가는 것입니다
한상 님과 조자룡 등이 몰래 넘어간
곳도 동일한 것으로 바로 이 간입니다
안성 님 등은 대국에서 공수 라면서
대국에서 칡 아는 바에 따라 토
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투자용 등은 소방 에서 공술 하면서
소방 에서 칭하는 바에 따라 2만
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로써 볼 때 하나의 강이 2개의
명칭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경주 시기에도 투 문건과 두만강을
같은 의미로 인식하고 있던 것이죠
게다가 정주 실력 1778년 1월
13일 기사에서도 압록강과 두만강이
우리나라의 경계 라는 내용이 나오며
천지 108 13년 12월 8일
기사에서는 도망 강의 부근 우리 땅
의 아니라고 한 내용이 확인됩니다
이처럼 조선은 전개 비가 세워진
이후에도 계속해서 톰은 강과 두만강을
같은 강 으로 인식해 쓰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역 였음을 알 수
있죠
그런데 19세기 말이 되자 갑자기
엄청난 수의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나중에 간 누 라 불리게 되는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러자 이를 두고 양국간에 다시
국경선 문제가 불거지게 됩니다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