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이야기 하는거 다 하시지요. 네? 내가 다 이야기 한다고 원한이 모두 풀리겠소? [기차와 박노인] 이무영 #책읽어주는남자 #오디오북 #책과함께하는하루단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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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대학을 다닐 때 여행 다니던 얘기를 잠깐 해드리려고 합니다.
그때는 지금 생각해도 요즘 대학생들 보다는 좀 더 낭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학생 때여서 자가용차도 없고 했으니 어디 맘 놓고 여행을 가려 하면 기차나 고속버스밖에는 수단이 없었죠.
그런데 그 둘 중에서도 여행을 할 땐 단연코 기차가 선호되던 때였어요.
특히 무궁화 열차는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로 적당하게 기차역들을 지나면서
여행이란 이런 것이다 하는 재미를 주었죠. 혹시 그때 생각나세요?
왠지 비라도 오는 여름날이나 봄의 꽃들이 흩날리는 날이나 눈이 내리는 겨울 어느 날
배낭을 둘러매고 혼자 또는 맘에 맞는 친구 한 명이랑 기차역에서 기차를 타고 무작정 떠나던 때를요.
그때 타던 기차가 저는 지금도 가끔 생각납니다. 창밖을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넋놓고 있던 그때가
오늘도 생각납니다. 자 잠시 딴 생각을 하다 왔는데요. 오늘 읽어드릴 작품을 생각하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오늘 제가 읽어드릴 이야기가 기차와 박로인 이무영의 작품이죠.
이 작품에서 기차는 소설 속 어떤 인물의 인생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고 또 어떻게 극복이 되어 갔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성을 띈 존재입니다.
이 작품은 나름 아이러니컬한 반전도 숨어 있어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까지 다 읽게 하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즐겁게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대체 기차와 박로인 사이엔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것일까요?
이제 이무영의 단편소설 기차와 박로인 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기차와 박로인 이무영
기차와 관련 있는 이야기를 쓰라는 편지를 받고 나니 까마득히 잊고 살아온 박로인 생각이 머리에 붕 떠오른다.
해방 전 일이니까 벌써 20년 가까이 된다. 그때 나는 서울에서 1시간 남짓해서 닿을 수 있는
케이역에서도 한심리 동쪽으로 들어간 국말이란 산기습 두 집 뜸에 살고 있었다.
아내 말을 빌리면 객기였지만 내 딴에는 농민문학을 하자면 농촌에 들어가서 농민들과 생활을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물론 지금 와서 보니 그것이 객기요 폐기가 되어버렸지만 그때만 해도 젊었었다.
레이몬드의 농민과 같은 사부작을 써서 일양 문단을 한번 뒤집어 놓을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농촌에 들어가 보니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첫째, 생계가 서지 않았다.
서울이 가까우니 채소를 해보겠다던 꿈도 꿈이었고 자리잡고 독서를 해보겠다던 계획도 허사였다.
만 5년간 복로방에서 막걸리 타령을 하다가 해방을 맞은 셈이 되고 말았었다.
그 덕에 몇 푼의 퇴직금은 물론 서울에 있던 7칸 반짜리 집도 날아가버리고 없어 5년이 되도록 집 한 채 없이 떠돌아 다니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국말에서의 5년간을 허송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이 5년간이 내가 가장 선량한 사람들과 생활한 기간이기 때문인 것이다.
사실 나는 단 한 사람의 지주를 제외하고는 거의 양처럼, 아니 흙처럼 순진한 사람들과 사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박노인도 대대 국말에서 살아오는 선량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지금도 바다를 모르는 충청도 산골 사람이나 강원도 저 깊숙이 두매로 들어가면 기차를 타보기는커녕 구경도 못한 사람이 많다지만 해방 전만 해도 국말은 안 그랬었다.
비록 오봉산 기슬계 두 집듬 세 집듬 가물에 콩나들 자리잡은 동네이기는 했지만 케이역까지 10리라고 하나 실은 8마장 산 거밖에 안 돼 있었고
한 시간이면 서울역에 와서 닿을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소위 진화사변이 일어나고 대동화전쟁이 잇따라 터지자 식량사정 때문에 서울사람은 시골로 시골사람은 서울로 엇박뛰어 왕래가 잦았던 터라
기차 못 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기차를 타보지 못한 사람이란 아이들까지도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 국말에서 50이 넘도록 기차를 타보지 못한 사람이 바로 박로인이었다.
타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엇이? 날 보고서 기차 못 타본 사람이라고?
그래, 못 타본 것과 안 타는 것과 같단 말인가?
같아?
기차 이야기가 나오면 이렇게 기승을 부리는 박로인이었다.
그래, 말 좀 해보게나.
안 타는 것과 못 타는 것과가 어떻게 같으냔 말이야?
그야, 둘러치나 매어치나 마찬가지지.
안 타서 못 타봤거나, 못 타서 못 타봤거나.
일부러 이렇게 세워대면 박로인의 그다지 상스럽지 않은 윗수염이 성난 짐승의 털처럼 곤두서는 것이다.
그래, 그게 같은 말이야?
안 탄 것하고 못 탄 것하고가.
그래, 여보게, 창선이.
자넨 학교도 다니고 했으니 알겠네나.
해명을 해주겨나.
저런 무식한 사람들이란 배운 사람의 말이라야 믿는 모양일세나.
젊은 사람들이 옆에 있을 나치면 이렇게 편을 들어달란다.
그러나 젊은 패들도 여럿이 그렇게 우기는 본의를 알기 때문에
거, 같은 말이지 뭐여, 요 아저씨?
하고 되려 이쪽 편을 들면
예끼 천치녀석들, 공부 헛했구나, 헛했어.
이 정도면 좋았다.
한 번은 창선이가 우게 되다가 담뱃대로 등줄기를 한 대 얻어맞은 후로는
달아날 구멍부터 보아놓고서야 말대꾸를 하고는 한다.
다른 사람들이야 속들이 있어 하는 소리지만
이런 광경을 처음 보는 나는 그 말에 박로인이 그렇게 노발대발하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처음 이런 말싸움 장면에 부딪힌 것은 국말로 이사를 한 지 닷새 만이었을 것이다.
남의 동네에 들어왔으니 인사를 차리는 것이 좋다는 부장말도 일리가 있느니라 싶어
그때만 해도 좀처럼 손쉽지 않은 돼지다리를 한자 9에서 외면을 삼고
막걸리 한턱을 내는 석상에서 덕만이란 젊은 친구가
선생님, 저희 동네에 들어오셨으니까 좋은 일 한번 하세요.
저, 우리 윤순애 아저씨 기차 한번 태워드리세요.
막걸리 김에 이렇게 농담을 시작한 것이 시초였었다.
아니, 뭐 저 녀석이 미쳤단 말인가?
무슨 속인지 몰라서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으려니까 부장이 있다가
저 사람이 나이 50이 넘도록 이때껏 기차를 한 번도 못 타봤답니다.
선생님은 세도도 좋으실 게고 하니까 좋은 일 하느라고
저 사람 끌고 가서 기차 한번 태워주시오.
이 농담이 그대로 말다툼이 되었던 것이다.
박 노인은 한 사람인데 못 탔다고 우겨대는 사람들은 여럿이었다.
입에 거품을 뿜어가며 말싸움을 하다 말고 더 참지를 못하겠던지
놀란 짐승 풍기듯하고는 막걸리잔을 구장의 얼굴에다 냅다 뿌렸었다.
구장도 지지 않았다.
구장도 붉근하더니만 단은 헤어졌을 망정 단거리일 모시 두루막에다
김치 그릇을 뒤집어 씌우고 말았다.
모두들 뜯어 말려서 나중에는 사화술까지 먹고 헤어졌었지만
나는 박 노인이 무엇 때문에 그 말에 그렇게도 기승을 부리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필시 그 무슨 곡절이 있는 성 싶었지만 어쩐지 남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것만 같아서
자일피일 하고 있는데 하루 저녁 때 박 노인이 막걸리 한 병을 들고 나를 찾아와서는 됐든
선생님은 날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렇게 묻던 것이다.
접대 그 말씀이십니까? 방으로 들어가자 해도 굳이 마룻 끝에 앉아서
풋고추에 고추장을 해서 막걸리를 먹자는 것이다.
자 고추는 내가 가져왔으니까 고추장이나 내시오.
하고 조끼 주머니에서 풋고추를 한 줌 꺼내놓는다.
역시 다 낡기는 했을 망정 광당포 조끼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살림이 군색지 않을 성도 싶다.
박 노인은 막걸리를 걸찍하니 한 잔 들이마시고는 밀수염을 쓱 씻고서
선생도 그래. 부장 녀석처럼 내가 기차를 못 타봤다고 생각하시오?
그야 안 타시는 것이겠지 못 타기야 하셨겠습니까?
이 말에 박 노인은 어린애처럼 신이 나서.
암 그렇지. 그렇고 말고요. 아무려면 그래.
내가 10점만 주어도 탈 수 있는 기차를 못 타봤겠소. 그렇지 않소?
그럼요. 그래. 그래서 배운 사람이 다르다는 거야.
부장 그 자식. 면장의 매부가 돼서 부장이 됐지만 보통 학교도 못 가봤거든.
동문선습도 못 뺀 친구요. 난 그래도 통감을 다섯 건이나 뗐거든.
지금은 내가 그놈의 기차 때문에 이 꼴이 됐소만 벼백이나 조이 했었소.
이래 보여도 내가 박희, 박정승의 직계자손이라오.
내 오대족께서는 찬판까지 하시고 이런 집안이오.
그러십니까? 그야말로 명문가계시군요.
암. 지금은 한데 섭슬려 이렇게 살지만 옛날 같았으면냐. 말이 되오?
말이 안 되지. 옛날 같았으면냐. 저도 이렇게 마주 앉지도 못했겠습니다.
전 농부의 아들이니까요.
어어. 그건 무슨 말을. 당치도 않은.
선생이야 옛날 같으면냐. 한림학사지. 내가 모르는 줄 아오?
다 들었어. 들었어.
그런데 아까 기차 때문에 많이 고통을 받으셨다고 그러시던 것 같던데.
이렇게 실마리를 풀어주려니까.
얘기 허리다. 그러지 않아도 오늘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소.
어제 저녁에도 왔더니만 글을 쓰신다기에 도로 갔지요.
좀 지루하더라도 들어주시려오?
말씀하시지요. 오늘은 아무것도 안 씁니다.
그래. 거 잘됐소.
거 뭐 무식한 사람들한테는 아무리 얘기해도 못 알아듣거든.
최규의 경일기지. 그야말로 우의도경이라니까.
박노인은 이렇게 격분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아까도 잠깐 말씀했지만 우리는 대대 벼슬을 하고 내려온 집안이었지요.
아버님 대에 와서 참봉벼슬에 끊기고 말았지만 명색이 나도 참봉이요만.
이렇게 시작한 박노인.
나중에야 과장인 줄은 알았지만 아니 박참봉의 이야기는 껑충 뛰어서 60년 전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때만 해도 박참봉 집은 100석 가까이나 하는 지주였었다.
그것도 천수답은 거의 없고 양석이 나는 구레떼미가 절반 이상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도 뭐 우리 조부께서나 가칭께서 치부를 해서는 아니지요.
모두가 선앙을 잘 써서지요.
우리 오대조께서 그때 돈 백량을 들여서 이 근방산소자리를 물색하셨지요.
관악산은 물론 국망산소까지 사싸시 뒤지시다가 이 오봉산으로 들어오셔서 반달봉을 찾아 냈더랍니다.
이 반달봉의 묘를 쓴 후로 갑자기 집안에서 참반이 났고 자손이 번창했으며 해마다 추수가 늘어서 조부때는 200을 넘는 추수였다는 것이다.
사실은 참반이 아니고 참봉이었었다.
집안이 불일 듯 한다는 말은 우리 집을 두고서 한 말이었지요.
심지어 찌팽이를 굳은 땅에 꽂아 써도 싹이 났다니까요.
우리 집은 대체로 귀손이었습니다.
오대독자란 말이 있지만 우리 집엔 칠 때까지 계속된 일이 있었지요.
그렇게 자손이 귀한 집에 오대조께서 반달봉 밑에 산소를 모신 후로는 4대조의 형제분, 3대조에 와서는 5형제분이었고
증조대부에 와서도 오남오녀로 자손이 번창하겠지요.
그러던 우리 집안이 그만 개 몇 년에 와서 한강 물줄기처럼 뻗쳐오르던 산혈이 툭 끊어지면서
오늘날 이 꼴이 되고 말았답니다.
개 몇 년에 무슨 일이 생겼던가요?
개묘라면 몇 해전이 되나?
내가 이렇게 손을 꼽고 있자니까.
금년이 무술년이니까 55년 전이지 뭐요.
생핀잔을 한 번 준다.
그 해 철도를 놓느라고 명산 오봉산의 산혈이 끊겼다는 것이다.
산혈이라뇨? 하고 묻는 말에
산혈도 모르오.
선생님, 신학문을 많이 배웠나 보구만.
학자 양반이 산혈을 모르다니.
사람한테 피가 있듯이 산에도 명산에는 혈맥이 통하는 법이지요.
선생님의 혈관을 끊어놓으면 살겠소?
피가 딴 데로 모두 흘러버리면 그만이지요.
산도 마찬가지라오.
산에도 혈관이 쫙쫙 뻗쳐 있거든요.
혈관이 끊겼는데 산인들은 어떻게 살겠소?
죽은 산이지.
명산일수록 산혈이 선명하지요.
누가 그걸 끊었던가요?
누가?
그래도 못 알아듣소.
화차지.
그놈의 화차.
기차 말씀인가요?
그렇소.
시체말로 기차야.
기차.
박노인의 눈에서는 불이 나는 성 싶었다.
무서운 증오였다.
노인은 눈앞에 적을 그려보듯이 눈을 지그시 감고
한동안 말이 없더니 다시 천천히 말을 잇는다.
그해.
그러니까 내 나이 겨우 여덟 살이었으니 뭘 알았겠소만.
내 조부와 같이는 침식을 이르시고 땅을 치며 통곡을 하셨소이다.
그것이 바로 외놈들과 을사조약을 맸던 전해였고 보니
그때 말이 구강이지 우리 상감한테야 무슨 실권이 있을 때요.
우리 반달봉 및 선앙의 주봉 허리를 끊고 철로를 놓겠다는 것이구려.
놈들이 조선 땅에다 철로를 놓자는 목적이 우리 명산들의 혈맥을 끊어서
인물이 못나도록 하자는 수작인 줄 모르고서
나라에서도 땅을 내어놔라 호룡호룡 했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니오.
우리가 덮어놓고서 반대한 것도 아니지요.
한 백간통만 피해달라는 것은.
그런다면 주맥을 안 잘리고도 철로를 놓을 수 있었거든요.
그러나 그땐 이미 외 헌병들이 방방곡곡이 와서 개쏘대듯 하던 때였소.
아무리 땅을 치고 발버둥을 하니 외놈들 귀에 들어갈 것이 뭡니까.
아버지는 놈들한테 상투를 다 꺼들리였고
내 조부께서도 옷을 갈갈이 찢기고 그냥 흙투성이가 되셔서 인사불성이었더라오.
내가 뭘 알았겠소만 나도 울고 덤볐던 모양이오.
나도 놈들한테 따귀를 얻어맞고 쓰러졌던 기억이 있지요.
그러나 그보다도 분하고 절통하고 이가 갈리는 건
같은 조선 놈들이 돈 몇 푼 벌어먹자고
남의 집 조상 선왕의 주벙허리를 끊어내는 것 아니겠소.
철로를 놓은 지 여섯 해 만에 나라가 망합디다.
산천의 혈맥을 그렇게 동강동강 끊어놓고서
어찌 나라가 흥하기를 바라리까.
그렇지 않소.
사람의 혈관을 동강내고서 그 사람이 살기를 바라겠소.
안 그러오.
그렇지요.
나는 이렇게 맞장구를 쳐주는 수밖에 없었다.
소위 풍수설에 대해서 아는 바 없지만
이것을 과학적으로 부인할 만한 이론적 근거가 전혀 있는 바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때의 그의 눈이 무섭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마치 뇌관에 불이 당겨진 폭발물 앞에 앉아있는 느낌이기도 했었다.
그날부터 조부께서 병석에 누우셨습니다.
조상들께서 고온히 주무시는 선왕 주맥을 끊고서야
어찌 자손된 도리로 살아있을 면목이 있느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시름시름 아르시기를 이태나 하셨을 겁니다.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온종일 간단없이 헛소리만 하셨지요.
저놈! 저놈을 잡아라! 목을 잘라라! 이런 소리를 하시는가 하면
아버님 이 불효자식을 육시 처참하소서 이런 잠꼬대도 하셨어요.
자식 된 자 앞에서 이 피 섞인 말씀을 듣자니 어찌 가슴이 터지지 않았겠습니까.
화차가 개통한 것이 값진 년 동지 딸이었습니다.
얼마를 참을 들여 내가 사온 막걸리를 안주도 없이 한 사발 들이키듯 하고
박노인은 천천히 말을 잇던 것이다.
잊혀지지도 않는 동진날 어느 날이었습니다.
화차가 지나가는 구경을 한다고 며칠 전부터 근읍 일대가 벌컥 뒤집어 엎였습니다.
분여자들은 설날이기나 한 것처럼 새 옷을 하느라고 법석이었고
정거장이 서고 당말에서는 별신장을 벌이느라고 한 달 전부터 방을 돌리고
출염을 걷고 논을 까문 기어 난가개를 짓는다.
술집에서는 읍내 가서 술 팔 계집을 데려온다.
그야말로 미친 것들 날뛰듯 했었지요.
말뿐이 아니었지요.
광대가 와서 줄을 메웠고 씨름꾼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한편에선 흉년 떠넘기기 줄다리기 준비에 바빴습니다.
약삭바른 봇짐 장수들이 박가분이다 가락지다 옷감이다를 이고 찌고
풀방굴이 귀에 드나들듯 했었지요.
소문도 가지가지로 떠돌았습니다요.
기차가 방처럼 생겼다느니 그런 게 아니고 실왕처럼 되어서
사람을 얹게 되었다느니 지붕이 있느니 없느니
불을 앞에서 뗀다느니 뒤에서 뗀다느니
정거장마다 물을 끓여놓았다가 부어주어야 하느니
벼르벨 소리가 다 돌았습니다.
지금만 해도 촌에서 나온 노인들은 기차를 탈 때는 신발을 벗어들고
타는 걸 본다니까 그때 신발을 벗고 탄다는 말쯤은 당연했겠지만
누가 낸 소문인지 품행이 부정한 여자가 보면 기차가 가다가 쉬어
버린다는 말이 파다하니 퍼졌어요.
그때만 해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던가 보
이 터무니없는 말을 모두 곧이 들 었더랍니다.
동네 여자들은 샘둥천에 모여서 는 공론이 자자하 했었지요.
예 헌말이라더라 화차가 뭐 귀신 이냐 부정탄지 아닌지를 알게
하고 가장 아는 체하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헌말은 왜 헌말이야 부정한 여자만 보면 기차가 딱 선대요
그러면 기차 안에 탔던 외놈들이 모두 뛰어내려서 그런 여자를 기차
깐으로 끌고 들어간대 외놈들은 어떻게 알꼬 저런 밥통
기차가 다 띵겨주잖아 말도 하나 보지야 하기에 그렇지
그러나 이정도면 또 괜찮았어요 말이 말을 나와서 아이 못 낳는 여자는
물론 남편 죽인 여자 16시 되도록 시집 못 간 처녀
나무의 첩 이렇게 되고보면 안걸리는 여자가 별로 없었어요
지금 사람들한테는 곧이 느끼지 않겠지만 이 허황된 말을 모두들 믿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분여자들을 구경 못가게 하느라고 누가 지어낸 말이었던 모양입니다만
한번 이런 소문이 돌자 너도나도 분여자들은 물러 앉았었지요
할머니와 어린애들만이 산에 올라가서 구경들을 했더랍니다
이 소란 속에서도 박씨 집에서만은 누구 하나 문 밖에도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복께서는 우리 집안 식구는 물론 박씨 문 중에서 기차 구경을 나가는 놈은 멸족을 시킨다고
엄명을 내리셨지요 요 근동에만도 우리 박씨가 32호나 살고 있으니까요
만약에 박씨 문 중에서 그놈의 것 구경을 나간 놈이 있거들랑 모조리 땅을 떼어라
이런 말씀까지 하셨어요 바로 그날 낮이었지요
새벽부터 동네 사람들이 화차 구경을 하러 몰켜나가고 동네가 텅 비이듯이 피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낮이 지나서 갑자기 천둥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지동이 일지 않겠습니까
사뭇 땅뚱이가 흔들리는 것 같았어요 오냐 오냐 그러면 그렇지
하늘이 무심할 수가 있느냐 천둥을 치신다 문을 닫아라
조복께서는 그것을 천둥이라고 아셨던 모양입니다
조그만 등성이가 가려서 보이지는 않았다지만 거리로 친다면 철록길까지엔 한 마장 좀 남짓한 정도로 보였습니다
그러니 왜 소리가 안 들렸겠습니까 하느님께서도 무심치 않으셨나 봅니다
저놈들도 이제 그 앙화를 봤겠지요 조목께서도 이렇게 영감님을 안위해 드렸었지요
그때 조복께서는 거의 탈진해 계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형의 눈치로서 그것을 알았습니다
수원으로 출가한 누님도 와 있었어요 모두 울고 계셨습니다
조복께서는 벌써 눈을 뜨고 계실 근력조차 없으신 것 같았습니다
부디 저 소리를 하느님 소리로 아시고 가셨으면 아버지가 할머니 귀에다 대고 이렇게 수군대셨습니다
나도 어린 속에 제발 그러기를 빌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사였습니다
조복께서는 갑자기 눈을 번쩍 뜨시더니만 와들와들 떨기 시작하셨어요
저놈이 지나가는구나 저놈이 아닙니다 아버지 천둥 소리입니다
놈들이 죄를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에 조복께서는
아니다 너희는 모른다 그놈이 지금 지나간다 저놈이 아니어요 영감 천둥이 야단입니다
비가 퍼붓고 너희들은 모른다 아 원통하다 원통
이것이 조부의 최후였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마친 박노예는 막걸리 잔으로 가져가던 손을 쉬고
귀를 기울이는 듯 싶더니 저놈입니다 저놈 하고 고함을 친 것이었다
그때 마침 서울로 향하는 특급이 지동을 치며 올라오고 있던 것이다
박노예는 막걸리 잔을 동댕이 치듯 하고서 양쪽 귀를 막고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입술이 폭풍만 난 꽃잎처럼 떨어댄다 저놈 저놈 한참 만에야 노인은 귀에다 손을 떼고 나를 멍하니 쳐다본다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영감께서 기차를 안타시는 신경 잘 이해하겠습니다
그래도 박노예는 못들은 채 하고 있더니 차소리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는지 얼마 동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내 얘긴 아직 반도 못했어 아주 다 하시지요 다 이야기 하시고 나면 속이 좀 시원한 법이지요
이야기한다고 내 원안이 풀리겠어 언제고 달리 풀어야지 무슨 뜻인지 이런 소리를 하더니만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박씨 가문의 원안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이제부터지요
나만 하더라도 기차의 재앙은 거기서 끝났거니 했었습니다 끝나기를 바랐던 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우리 박씨 집의 기차 재앙은 조북께서 작구하신 달부터 진짜로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첫째 재앙은 논 50석지기가 거저 날아간 것입니다 철로에 들어간 땅만이 50석지기 였는데 그나마 돈을 안 준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원통할 노릇은 이번에 들어간 논들이 그야말로 계란의 노른자유였거든요
돈을 몇 곱 쳐준다 해도 원안이 안 풀릴 텐데 이놈이 우리 정보들을 협박해서 토지 수용용이라던가 뭔가 하는 법을 갑자기 만들어가지고
땅값은 커녕 1년 추수값도 안 치러 준다는 것이 아닙니까 난 안 받는다 이 날도둑놈들
다 먹어라 다 먹어 이 나라 땅덩이를 몽땅 한 입에 털어 넣어라 아버지는 길길이 뛰셨습니다
그러나 뛴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아버지는 외 헌병대에 두 번이나 불려가서 실컷 매맘맞고 돌아오셨습니다
쇠가 쇠를 먹고 갈치가 제 동족 꼬리를 잘라 먹는다더니 조선놈이 더하더랍니다
헌병 보조원이라는 놈이 왜 헌병 보다도 더 날뛰더라니 그런 죽일놈들이 있습니까
매맞고 땅 뺏기고 그러고도 줄곧 그놈들한테 반외 사상이라고 외놈들 반대한다고 말여 줄곧 물려만 지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 가문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경술련의 나라를 빼앗기자 아버지는 통 맥을 못 쓰셨어요
조복께서 유언하신 대로 아버지께서 그날 화차 구경을 갔던 박씨 가문 중 10여 집의 땅을 뗀 것이 원한을 사서
육촌 조카놈이 아버지한테 심한 행패를 부려서 달포나 누우셨었고 같은 박씨 문중이면서도 원수처럼 따돌려 아버지는 물에 기름처럼 지내셨더랍니다
그렇다고 조복께서 유언하신 것을 어쩔 도리도 없지 않아요 창피한 이야기올시다만 오총과의 사이에 재판 소동이 났을 때도
번여원이 저희가 이겼어야 할텐데도 두 번이나 내리져서 땅을 섬지기로 팔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문서는 없지만 조복께서 빌려준 돈을 갚았다고 떼를 썼던 것입니다
집안간에서도 다 잘 아는 내용이었었는데 땅을 뗀 안가품으로 모두가 짜고서 딴소리들을 했으니 질 밖에 있겠어요
이래저래 아버지께서 화가 나시니까 나무이 꼬이며 넘어가셨습니다
내가 20살 때였을 겁니다 아버지는 장터 정재봉이란 사람이 꼬이며 넘어가 군산으로 인천으로 쫓아다니면서
미두에 손을 대어 거의 파산 지경에 빠지고 말았어요
아무래도 할아버님 산소를 옮겨야 할까보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산의 현맥이 끊겼고 보니 자손이 잘 될 까닭이 없지 않느냐
이래아요 또 막대한 돈을 들여서 오봉산 서쪽으로 이장을 했었지요 그 이듬해 내가 첫 자식을 낳았습니다
이제 집안이 좀 되잡히려나 보다 진작 이장을 했더라면 집안 꼴이 이처럼은 안됐을지도 모르는걸
아버지는 이렇게 좋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허사였습니다 누가 권하는 이가 있어서 스탠다드 석유회사 지점을 하는 것이 좋다는 바람에
아버지는 영등포에다 대리점을 버렸었지요 다행히도 곧잘 되어 갔던 모양입니다
아버지는 어쩌면 은행에 잡힌 땅도 찾게 될 것 같다고 대견해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뒤늦게나마 서울 학교에를 갈 꿈을 꾸었었지요 그러나 그것도 한낱 꿈이었더랍니다
하룻밤 집에 내려오셨다가 올라가보시니 거짓말처럼 상점은 터만 남고 말았던 것입니다
숙직원이 불단속을 잘못하여 홀랑 타고 말았어요 이제는 어쩔 도리도 없었습니다
땅은 그대로 은행으로 넘어갔고 실양거리도 별로 못 남기고서 몽땅 팔아대지 않을 수 없었지요
내가 23살 때 일이었습니다 이러니 기차를 보는 내 눈에 불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정말 영감 심정을 이해하겠습니다 나라도 그런 기차는 죽어도 안 타겠습니다
그런데 저 무식한 놈들이 날 보고서 기차를 못 타봤다고 놀림감을 사무려드는 게 아닙니까
농담으로들 하는 소리겠지요 농담? 그놈들 그런 농담 두 번만 했다간 큰 코 다칠걸
참으십시오 다 웃는 말로 한 것을 이렇게 위로를 하는 나한테도 감정이 가는지
박노인은 벌떡 일어나면서 이렇게 매어 다친 것이다
댕마저 그러시오 그러고는 두 팔을 회회 내 저으며 횡환히 가버렸었다
박노인한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후로는 누가 박노인을 놀리기만 하면 내가 나서서 말막음을 하고는 했었다
정말 무식한 사람들이란 할 수 없는 일이라 싶어진 것이었다 함께 울어줄 수도 있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이야기만 듣고서도 내 마음이 이렇게도 아픈데
황차 그의 일생을 자기네 눈으로 보아오고서도 차마 그럴 수가 있으려 했다
이런 나의 값싼 동정에도 척 기댈 수 있는 박노인이었었다
그만큼 지금의 박노인은 고독했었다
나도 그때 뿌리치고서 선생처럼 공부나 했더라면 오죽 좋았겠소
워낙 조부께서 완고하셨고 나도 몸속의 화초처럼만 자라와서
아버지께서도 어쩌자고 날 이런 구석에다 쳐박아만 놓고
박노인은 이런 푸념을 하다가도 다 내가 잘못이었지 못 나서
이렇게 자책도 하는 것이었다 뭐 그때만 해도 나만 똑똑했으면 중학교야 못 다녔겠소
재질이도 못났었지 어쨌든 선생님 같은 분이 동네에 들어오셔서 좋았소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이것이 그의 진심이었을 것이었다
한 번은 장에 나가던 길이었다 국말에서 장에 가자면 조그만 고개를 둘 넘는다
대개는 곧장 철로길로 나서서 레일을 따라가면 훨씬 가깝지만
박노인은 절대로 철길로는 다니지 않았다
장에 가다가도 기차가 오면 슬쩍 외면을 해버린다
수십 년 그렇게 해온 터라 지금은 아주 한 습관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기차를 만나거나 기차 소리가 들리거나 했을 때의 그 보기 추할 만큼 일그러지는 얼굴 표정도
지금은 거의 생리적이었다
저 소리를 들으면 지금도 가슴이 찌르르 하고 아퍼오
그는 이렇게도 말하며 마침 올라오는 기차 반대쪽을 바라보고 섰다
그 옆 얼굴이 처참했다 나까지 생리적 고통을 느낀 듯이 퍼지던 것이다
장에서 돌아올 때는 둘이 다 거나 했었다
닷새에 한 번씩 서는 장날 선술집에서 너비아니에 약주를 마시는 것이 시골 내려온 후의 나의 유일한 취미이기도 했었다
첫 산등성이에 올랐었을 때다 또 기차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심정을 아는지라 어둡겠습니다 불이 낫게 갑시다
하고 내가 앞장을 서도 박 노인은 그저 멍하니 서서 내려오는 기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찍이 전에 없던 일이었다 가십시다 하고 끌어도 놔두시오
저놈의 기차가 내 앞을 버젓이 지나가나 보고 가려오
그까짓건 봐선 무엇하시오 갑시다
날도 굳겠는데 아무래도 한 줄금 할 것 같습니다
올템 오라지 이렇게 버티고 서 있는 박노인 앞을
그러나 기차는 버젓하니 검은 연기를 푹팍 대면서 지나가고 있다
아 저런 죽일놈 역부러 거두름을 피우잖는가
박노인은 주먹을 내어두르며 소리소리 질러댄다
보기에도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이 처참한 운명의 박노인한테 기차는 또 하나의 재앙을 갖다 안기었던 것이다
내가 국말로 이사한지 3년째 나던 해 겨울이었었다
일본은 엉뚱하게도 미국한테 선손을 걸고는 청년들을 마구 일본으로 남양으로 실어갔었다
박노인의 둘째 아들 윤수한테 징용장이 나왔던 것이다
장기 6개월 징용에서 풀려나온지 반달도 채 못되었지만
발악을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백정이 미친게 잡아가듯 하던 때였다
큰아들만은 대전역 보선구의 현원 징용이 되어 동생도 거의 말이 되어가는데 덜컥 징용장이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쯤의 비극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더 큰 비극
아니 기차는 박노인의 원한을 샀던 것이다
윤수는 부산으로 수송되던 도중 대전역을 지나다가 제 형을 보고 뛰어내리고 말았었다
그리고 죽어버린 것이었었다
워낙 감시가 심하니까 차가 움직인 후에 뛰어내린다는 것이 바퀴 속으로 기어든 것이었다
박노인의 기차에 대한 원한은 이로써 족할 것이다
아니 나는 이 이상 기차에 대한 그의 원한과 저주를 기록할 용기가 없어진 것이다
윤수를 잃은 후에 박노인의 비통과 저주, 발악도 나는 이 이상 더는 기록하지 않으련다
다만 그런지 며칠 후 서울을 출발한 밤열차가 K역과 E역 중간지점의 고개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박노인의 선앙이 있는 반달봉 주벅 밑에서
불의의 사고로 16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 돌발했다는 사실만을 기록해 둔다
고개 내리막 레일이 절단되어 있었던 것이다
기관차는 객차를 단 채 10미터나 되는 비탈로 내려 굴렀었다
범인은 달아나지도 않았다
달아나기는 커녕 박장대소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박노인이었었다
해방전전해 겨울의 일이다
해방이 되자 나는 궁말을 뜨고 말았던지라
그 후 박노인의 소식은 들을 길이 없다가
바로 며칠 전 10여 년 만에 우연히 서울역 앞에서 딱 마주쳤다
나도 반가웠지만 나보다도 그가 더 반겨주었다
참 반갑소!
그는 나의 손을 덥석 잡고 제법 신식으로 흔들어주었다
참 반갑습니다
조금도 안 늙으셨습니다
사실 그때로부터 15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박노인은 그때보다도 오히려 젊어 보이기까지 하던 것이다
의복도 깔끔했다
어딜 가시는 길이십니까?
하고 묻는 나에게
그는 이렇게 시원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내 아들이 지금 검차 계장이지요?
그 덕에 이런 것도 가지고 다니지요?
하면서 주머니에서 쓱 내어보이는 것은 가족 패스였었다
좋으시겠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이렇게 치아를 하니까 박노인도
다 아들이 철도국에 다니는 덕분이지요?
안 그러면 이렇게 무시로 다니는 그 돈을 다 어떻게 대겠소?
다 아들 덕이지
철도국 덕분이고
재밌게 들으셨나요?
해방이 되기 바로 얼마 전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으로 마지막 발악을 하던 시절에
일제는 우리의 자원을 더 신속하게 수탈해 갈 방법으로
철로를 놓고 기차를 다니게 했습니다
그때 보상도 없이 땅을 빼앗긴 사람들이
박노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였었죠
더구나 자기의 둘째 아들마저 기차 때문에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면
박노인으로서는 기차에 대해 악감정을 갖는 건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기차를 안 타게 된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끝까지 다 살아봐야
득실에 대한 세임을 할 수 있는 법이던가요?
그렇게 평생 기차와는 원수로 지낼 것 같던 박노인이
철도국 직원으로 있는 큰아들 덕분에
가족 무료 패스폰을 들고 수시로 기차를 타고 다닌다며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은
그의 우울했던 인생에 조금이라도 보상이 된 것 같아 부족하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론 작은 보상이 주는 혜택의 단맛에 빠져
필생의 적을 쉬이 잊어버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일제의 만행을
이제는 과거의 일로 치부하고 그만 잊어버리려는 일부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면서 씁쓸한 입맛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소설 읽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이무영의 단편소설 기차와 박노인을 읽어드렸습니다
다음에 또 재미있고 유익한 작품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다음에 또 뵐 때까지 행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