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의 작은 유목민족이 어떻게 중국 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 청나라의 역사 총정리 몰아보기 통합본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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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역사 총정리 몰아보기 통합본 1부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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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 돋보기입니다 다시
돌아온 유목 민족사 있니다 이번 유목
민족사에서 청나라의 역사를 조망해
보는 시리즈를 다뤄보고자 합니다 어
청나라가 왜 유무 민족사 중국사
아닌가라고 의아해 하실 수도 있을
텐데요 청나라를 건국한 건 중국인이
아니죠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죠
만주족의 전신은 여진 족인요 이번
일부에서는 만주족이 건국한 청나라
이전에 그 내막과 배경인 여진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주 땅에 살던
여진족들은 12세기 금나라를 건국해
중국 중북 방까지 영토로 넓혀 다가
13세기 몽골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습니다 이때 정말 많은
여진족들이 몽골 족에게 학살을 당했죠
결국 여진족들은 다시금 그들의 고양인
만주 땅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예전처럼 부족 단위로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선 원명 교체의 혼란시기
또 한반도에선 고려조선 교체에 혼란
시기를 틈타 만주의 여진 족들 자리를
잡으며 그들의 사력을 확장해 갔습니다
명나라는 당시 여진 족들을 크게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 여진 이렇게
세 가지 세력으로 분류했는데 두만강과
암락 kan 1 때에 거주하던
여진족이 건 주여진 그보다 더 북쪽에
거주하는 해서여진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쪽의 야인여진 이렇게
나뉘죠 훗날 등장하는 누르하치는 바로
건주 여진인 우선은 누르하치의 6대
조상인 문키 테모르부터 시작해야겠네요
문키 tem 먼터무 몽골식 발음이라고
하며 한자 표기법을 한국어로 읽으면
동맹 가천 모가 있니다 이름은 먼터무
통일하겠습니다이 먼터무 이게 베스트
프렌드가 있었으니 바로 이성계
있습니다 두만강 일대를 포함해 지금의
함경 도인 동 면을 주름잡던 이성계는
먼터무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성계의 의형제이자 조선의
계국 공신이기도 했던 이지란 여진족
이름으로는 퉁두란 역시 먼터무 부족의
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 이성계가 되자
더더욱 북방 국경의 안전을 위해 태조
이성계는 먼터무게 관직을 내려주고
회령 당에 거주하도록 도와주는 등
먼터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죠
덕분에 조선 계국 당시엔 여진족들이
말썽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자 그런데
태중 이방원이 왕이 되면서 조금
상황이 달라집니다 태중 이방원은 제위
초기 함경북도 경험과 경성의 무역소
설치해서 여진족에게 교역을 허용하는
등 여진족에게 잘해 주려고 했습니다이
문제는 명나라 있습니다 어느 정도
중국 본토 확장을 끝마친 명나라는
이제야 비로서 만주의 눈독을 들리기
시작했는데 만주에 퍼져 있는 여진
족들에게 관직과
교역증가율
kan 2북 옛 고구려 초창기 영토
지역에 건주위 설치하고 제일 먼저
명나라에 입주했던 부족장이 먼트의
라이벌이었던 어허 true 건주 위에
책임자로 임명합니다 조선과 광국
시점부터 늘 친분을 싸워왔던 먼터무
끝까지 친 조선 정책을 고집하다가
결국에는 명나라 관직을 받기로 합니다
명나라는 어허 true qu 먼터무
사력 균형을 고려하여 압록강 이북에는
건주위 영향권으로 두만강 이북
그러니까 먼터무 근거지에 건주 좌위
따로 만들어 주어서이 어허 추가
먼터무 각각 따로 세력권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러나 먼터무 명나라
입조를 배신으로 간주한 태종 이방
원은 1406년 모든 여진 족과의
무역을 전면 폐쇄했고 이에 반발하여
여진족이 북방 국경 지대를 약탈하기
시작합니다 태종 제위 중후반부에 북쪽
국경지대는 정말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죠이는 세종대왕 재위 초창기에도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에이 여진족
문제는 반드시 해결을 해야만 하는
문제였습니다 한편 암록 강 이북의
건주 위에서는 어허 7이 죽고 그
손자였던 이만 주가 세력을 이어받아
시시 대대로 암록 강 남쪽까지 내려와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세종대왕은 재위
초반엔 여진 족들에 대해 다소과
대하게 나가기로 합니다 여진족이
귀순을 장려하기 위해 말단이 관직을
주거나 정책을 위한 토지와 주택을
주어 조선 주민들과 동화할 수 있도록
물심 명면 힘 썼죠 더불어 먼터 모도
조선과 적대적인 관계는 원치 않는다며
세종에게 아들을 수차례 보내 친선의
뜻을 밝혀왔습니다 다만 세종대왕은
철저한 정봉 론자 있습니다 그저
약탈한 여진족을 토벌하는 수준이
아니라 북방 지역을 완벽하게 조선의
용토를 편입시키려는 더 큰 꿈을
끌리고 있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귀순한 여진 족들을 거기에 살도록
보장해 준 겁니다 먼터무 와도
표면적으로는 친하게 지내려고 했던
이유도 당장은 이만주의 권주의
여진족들이 말썽이라 여진족 부족들
전체를 다 적으로 돌릴 수가 없었죠
1432년 12월 세종 제외
14년째가 되던 해에 여진족 일부가
압록강을 넘어 과거 태중 이방원에
설치해 두었던 여연구 침략을 하자
1433년 최윤덕 장군에게 군대를
주고 암록 강을 넘게 해서이 파저
강에서 이만주의 권주의 여진 적들을
토벌니다 제 1차 파저강 전투로
최윤덕은 자성군 설치하였습니다
최윤덕이 여진 정보은 성공적 었지만
2만주를 죽이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건주
자위의 먼터무이 먼터무 세종 정권기에
조선과 관계를 회복해서 좋게 지내고
있었는데 옆에 이만주 세력이 조선
군대에게 의해 박살나는 걸 봤습니다
이러면 먼터무 딜레마에 빠지는 거죠
조선과 관계가 악화되면 좋을게 없어요
그런데 조선이 이만주 치는 거로 보고
언젠간 조선이 우리들의 뒤통수도 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겠죠 사실 세종
대형이 최윤 대에게 내린 밀명을
있었습니다 때마침 명나라를 방문했다가
자기 부족으로 돌아가던 먼터 물을
암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최윤덕이 암살
시도는 실패하지만 하늘은 세종대왕
편이었지 1433년 먼터무 부하에게
살해 됩니다 먼터무 죽자 두만강 일
때 대혼란이 찾아왔고 이틈을타
세종대왕은 김종서에게 군사를 주어
두만강으로 보내 건주 좌위 여진
족들을 토벌하고
1434년 육진을 개척합니다
1437년 세종대왕은 2천에 다시
한번 파저 강으로 가서 이만주 부족을
토벌하라 했고 제 2차 파저 강에서도
2천이 크게 승리하여 무청구 우회는
추가 설치하여 4군 육진이 완성됩니다
그러나 이만주의 건주위 여진족들은
여전히 건제 있고 호시탐탐 조선에
복수를 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문종 단종 세조로
이어지는 전국의 혼란이 이어지면서
이때 군 육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정변 후 어느 정도 전국을
안정화시킨 세조는 신숙주를 통해 먼저
두만강의 여진 족들 도발합니다
1460년 신숙주가 두만강을 넘어
조선정부에 대항하던 여진족 부족들을
초토화시킴 적 400 30명을 죽이고
9채의 집을 불태웠으며 우만 천마리를
확보하는 어마어마한 전가로
세웠습니다이 전쟁이 세조의 1차
북벌이 그리고 암록 kan 이만주의
권주의 부족에 대해서도 명나라와 함께
연합 토벌 직전을 벌이기로 합니다
이때 조선의 군사에게 절정을 찍을
때라 명나라가 오기도 전에 조선군이
이만주 부족을 토벌했습니다 이게
1467년 세조의 2차 북벌이 여진족
200명을 사살하고 적장 수급의 수가
40급 불태우 민가가 100채 빼앗은
병장기와 우마를 살 수가 없었고
만주도 죽습니다 세조는이 전쟁으로
인해 건주 여진이 멸망했다고 말하며
스스로 자화자찬 했습니다 아 물론
건주 여진이 멸망까지 아니지만이
세력을 회복하는 데에만 또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다른 여진 조과의
완충 작용을 하던 건주 여전이
조용해지자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살던 야인 여진이 이따금씩 두만강
유약을 침략하고 약탈했습니다 만
이전에 건주여진만큼 심각한 건
아니었죠 건주 여진의 세력이 매우
약해진 틈을 타 북방의 해서 여진이
강력해집니다
해서 여지는 만주 북방에 있기 때문에
조선에게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아서 뭐
우리에겐 잘 알려져 있지는 않은데요
해서 여지는 울라 하다 여호 호이바네
개의 부적으로 구성이 되어 있었으며네
개의 부적이 공동으로 모시는 해서
여진의 시조는 나치 블루 있습니다
나치 블루는 주몽 이성계 누루하치 럼
신궁이 있다고 하는데요 나치 블루의
해서 여진 세력이 워낙 강해서 명나라
초기엔 건주 여진에게 관직을 하사한
것처럼 나치 블루에게 관직을
하사했습니다 나치 블루를 계승한 아들
도로우 는 해서 여진의 영향력을 매우
크게 넓혔지만 몽골 초원 동쪽에
거주하던 몽골계 유목민족 우량카이
족에 거듭된 공격을 받아 해서 여지는
남하하여 옛 부여 영토인 송화강
유역에 정착했고 울라 하다 여호
호이아 해서 사부로 찢어지게 됩니다
이중 초기 해서 여진을 주도한 건
하다 있습니다 조선의 북부로 건주
여진이 약해졌을 때 해서 여진을
강력하게 키워 놓은게 하다 있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해서 여진의
패권이 하다에서 여로 넘어갔습니다
여허춘자
승리하여 평화조약을 맺고 하다 주도의
해서 여진은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니 명나라 입장에서는
하다 주도의 해서 여진을 견제를
해야만 했는데 이때 명나라에서 요동
방면 책임제로 부임한 사람이 장
과정에 추천했다는
이성량이었습니다이 성량은 이이 즉
여진족은 여진족을 견제하자 해서
여진에 대항하기 위한 대항마로 그간
해져 있던 건주 여진의 제기를
도와주기로 합니다 때마침 건주 여진에
해성처럼 등장한 기리 나가 있었거든요
바로 누루하치
[음악]
누루 아치의 할아버지가 건주여진 부족
중 어느 한 부족의 부족장이 있는데
누루 아치의 아버지와 기모가 누루
아치를 조금 많이 싫어했나 봅니다
눈치밥 보이던 누르하치는 이른 나이에
부족에서 쫓겨나듯 나와 버리는데 이때
누루 아치의 아버지는 누르하치에게
일말의 재산도 나눠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루 아치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지금의 중국 심양 시에서
상단을 꾸리며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심양 시가 중국으로
들어가는 교통의 요지라 나름 큰
도시였고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었습니다
상대의 규모를 확장해 가던
누르하치에게 뜬금없이 기회가
찾아옵니다이 성냥은 해서 여진을
견제하고자 누루하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부족을 키워주고 있었습니다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이성영의
명나라 군과 함께 해사 현진과 잘
싸우고 있었는데 느닷 이성영의
명나라군이 누루 아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까지 죽입니다 명나라 군대가 왜
자기네 팬을 들어준 누루 아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죽였는지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토사구팽이이었을 수도 있지만 여전히
해서 여지는 건제 있거든요 누루
아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죽자
가출한 누루 아치는이 상황을 기회로
삼기로 합니다 1583년 누루 아치는
고작 부하 133명을 데리고 처음
거병하여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면서 가까운 부족에서 터
차례차례 복수해 나갑니다 그의 나이
살이었습니다 누루 아치는 신앙에서 터
암록 강을 거쳐 두만강까지 부족들을
동쪽으로 쭉 밀고 나갑니다 갑자기
누루 아츠의 등장으로 이만주 토벌
일에 별 볼일 없던 건주 의진이
급속도로 세력이 커집니다이 성량도
누루 아츠의 성장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그동안 건주 여진이 부족
단위로 흩어져 약해져 있는 동안
블라디보스토크의 야인 여진이 두만강을
종종 넘어 조선을 약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루 아츠가 두만강까지
진출하는 과정에서 야인 여진이 밀리고
그 지역에 흉년 아지 들자 야인
여진의 여러 부족들을 다 합심하여
대규모로 조선을 침공했습니다 당시
조선으로 쳐들어온 야인 여진을 거느린
부족증이 니탄 였는데요 1583년
두만강을 건너 조선을 대대적으로
침공한이 야인 여진의 습격을 니탕개
난이라고 부릅니다이 니탕개의 반란을
진압한 사람이 바로 조선의 신립
장군입니다 신립은 직접 기병대를
이끌며 니탄 계의 1만 병력 여진의
돌진해 수천 명을 죽였다고 합니다
여진족을 상대로 기병전 승리한 건
대단한 일입니다 이로 인해 신립
신립의 기병대는 조선에서 영웅 칭송을
받죠 니탕개 죽고도 통제를 잃은 야인
여진이 지속적으로 두만강을 넘었는데
니탄 계사 후 야인 여진의 잔당을
소탕했다 사람이 당시 북방에 근무하고
있던 이순신이죠 다시 누루 아치로
돌아오자면 명나라는 누루 아치를
전폭적으로 키워서 해사 여진을
소통하고자 1588년 누루 아츠를
건주 자위의 총책임자 도둑 천사에
임명합니다 과거 먼터무 이만주의
사력을 회복했던 거죠 명나라가 누루
아츠를 키운 방식은 그저 관직이
전부가 아니었는데요 명나라 정부는
자국과 교역할 수 있는 권리를 증서로
만들어 여진 부족들 테 뿌려줬는데
누루 아치한상 하듯이 다 주고 네가
알아서네 부족들 테 분배해 줘라
이러니까 여진 사회에서 누루 아치의
위상은 독보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해사 여진의 세력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해사 여진 4부족
중 하다보 대신에 여호와 명나라 편에
서며 해서 여신의 강자가
됩니다 이로부터 몇 년 뒤 1592년
한국은 물론 중국까지 흔들어 놓았던
대규모 아시아 세계 대전이 터집니다
바로 인지란 이죠 누루 아츠의 여진족
또한 임진 혜란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임진 회라는 일본이 한국과 만주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 대륙 정보 을
위해 일으킨 전쟁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무너뜨리고 명나라로 들어간다면 조선
다음은 만주일보 될 것입니다
1992년 8월 인지란 발발한지
4개월쯤 됐을 때 누루 아치가
선조에게 먼저 파병 여부를 제안해
옵니다 이때 이미 선조는 수도 한양을
탈출해서 지금의 신의주에 있었죠 아직
명나라 원군이 도착하지 않은
시점이었던 지라 조선 정부 입장에서는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제한이지만
류성룡 등 일부 신하들의 적극적인
반대로 거절합니다 이유는 여진족의
도움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았다가
언젠가 저들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올 수가 있기 때문이었죠 맞는
말이긴 합니다 여태 누르하치는
명나라에게 서포트를 받았지 조선이라는
별다른 접촉이 없었거든요 누르하치가
만주의 제 1인자로 거듭나려면 조선과
관계를 회복시켜 교역을 한다든지
조선이라 뭐라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임진란 막바지었던 1998년
1월에 누르하치가 한 번 더 파병을
제안했으나 이번에도 조선 정부는
거절했죠 비록 누르하치의 직접적인
군서 원조는 없었지만 도움을 아주 안
받은 건 아닙니다 선조가 피신과 있던
신의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진족 약탈이 성행했던 곳이고 여진
들이랑 상당히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여진족들이 압록강을 또 넘으면 조선은
일본을 상대해야 하는 시점에 위아래로
샌드위치 당할 형편이었습니다 최소한
누르하치가 일본이랑 연합해서 조선을
공격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우리
입장에선 다행이었죠 누르하치의 건주
여진도 임진 내란을 통해 아무 이득을
못 본 건 아닙니다 조선의 파병을 간
명나라 원군 상당수가 조승훈 이어송
등 원래 여진 족들을 컨트롤하는 요동
병력이었다이 성냥의 아들이고 명나라
요동 병력 태반이 조선에서 군사를
많이 잃고 오니까 여진족에 대한 요동
병력의 통제력이 심각하게 약해집니다
이틈을 타 누루 아치가 그간 자신이
도움을 받아왔던 명나라의 송곳니를
꺼내기
시작하죠 인진 네란 당시 분명
일본군이 여진족에게 위협적이었다 7의
건주 회진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던 이유가 또 따로
있습니다 물론 누루 아치가 조선
조정에 먼저 원군을 제한하기 했지만
조선이 수락을 해도 누르하치에게 아마
여유가 많이 없었을 겁니다 누루
아체의 건주 여진이 아직 해서 여진과
승해 보지 않았잖아요 한 임진란
도중이었다 1593년 해서 여진과
건주여진 사이에서 만주의 패권을 두고
대규모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통합된
건주 여진을 치기 위해 해사 여진이
3만의 병력을 동원했습니다 이에 반에
누루 아치가 반격에 나선 병력은
고작해봐야 1만 명 병력차 세 배나
나는 열쇠에서 느루 아치의 건주
예진이 덜커덕 대승을 거두어
버립니다이 전투을 구의산 전투 혹은
구화산 전투라고 합니다이 전투로 해사
여진이 개박살이납니다 만약 임진
해란이 안 터지고 요동 병력이 그대로
있었으면 아마 건주 여진과 해소
여진이이 정도로 대규모 전쟁을 못
치르도록 명나라가 막았을 거예요
명나라가 그강 건주 여진을 후원한 건
해서 여진의 완전한 토벌이 아니라
해서 여진과 건주여진 사이 힘의
균형이 있습니다 그런데 명나라가
임진란 때문에 만주의 신경을 못 쓴
사이 힘의 균형이 깨져 버렸고 누루
아치가 명실상부 만주의 최고 패권자
거듭나 버리면서 만주의 질서가 완전히
재편된 겁니다 이러면 그동안 사이가
좋았던 명나라와 누치 관계가 긴장될
수밖에 없고 조선도 누루 아치에
대해서 신경을 곤들 설울 수밖에
없었죠 누르하치는 해서 여진의 완
전한 통합을 위해 나섭니다 1599년
해서 4부 가운데 하다가 가장 먼저
누르하치에게 통합되었고 1607년
호위 하부도 누르하치에게 통합됩니다
카트는 누르하치는 다음 타겟으로
울라브 삼았는데이 울라브 두만강 근처
진일 때에 있었습니다 누르하치는
조선을 지켜주겠다는 명목으로
두만강에서 해서 여진의 울라브 이일대
야인 여진과 전투를 벌려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이 전투가 오가람 전투입니다
오가람 조선의 함경도 소속의
산이었는데 오가람 전투에서 누루
아츠가 승리하며 야인 여진을
복속시켰다 진일 때의 주도권을 상실해
버립니다 1613년 누루 아치는
울라브 잔당들을 도발하며 완전히
복속시키는 이제 남은 해사 여지는
여호의 남게 되죠 여호 이렇게 커버린
누르하치와 전면전으로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는
명나라와 연합합니다 명나라가 해사
여진을 견제하기 위해 건주 여진을
키웠지만 이젠 그 순서가 거꾸로 되어
버린 겁니다 1616년 여호의 제외한
다른 모든 여진 부족들을 통합한 누가
가치는 아예 국가를 선포하고 황제를
칭합니다
나라 이름은 과거 여진족의 국가
금나라를 그대로 닿았으며 이전에
금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누루 아치의
금나라를 후금이라고 구분하기 발음은
아이신 있데요 나라 혹은 국가를
여진어 구름이라고 해서 누루 아치가
세운 국가명을 그들 발음대로 읽으면
아이신 구름입니다 누루 아치의 다음
상대방은 여호와 여호 붙은 명나라
있죠 누루 아치는 7대 한이라고
알려진 명나라를 공격해는 이후 일곱
가지를 발표하고 1618년 지금의
중국 윤영성 무순을 손바닥 뒤지듯
손쉽게 점령합니다 이제 명나라도자기
누치를 가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명나라의 요동 병력은 해사 여진의
여호와 연합해 대규모 군대를 꾸리고
누루 아치를 완전하게 토벌하기 위해
대전쟁을 버립니다 바로 사루 후
[음악]
전투 누루하치 토벌을 위한 명나라의
요동 병력의 사령관은 요동 경략
양호했습니다 양호는 명나라군이
47만이나 된다고
떠벌렸다 있고 양호는 조선에도 파병
요청을 합니다 이때가 바로 광 군
때였는데 조선 입장에서는 임진 내라
때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 주었으니
마냥 거절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다만
광해군은 누가 봐도 누루 아치의
승리를 예상했고 뻔히 질 거 같은
싸움에 병사들을 사제로 내몰고 싶지도
뜨는 태양을 져버린 채지는 태양에
배팅을 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대소 신료들은 심지어 광해군의
여당인 부인들조차 한마음 한 뜻으로
아무리 그래도 명나라를 져버리고
오랑캐와 손을 잡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광해군은 무응답으로
모른채 하려고 했으나 요동 경락
양호는 광 광해군을 맹 비난하며
파병을 독촉했다 조선 신하들이
등떠밀어 별수없이 광해군은 1619년
2월 21일 강홍립 장군을 도원수로
김경서 장군을 부원수를 삼고 1
3,000명이 압록강을 건넙니다
명나라 군은 크게네 개의 부대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우선 말림이 이끄는
북로 군이 개원해 두송이 이끄는 서로
군은 심양에서 이어백이 이끄는 남루
군은 요양의 그리고 유정이 이끄는
동루 군이 단동에서 출발해 네개의
부대가 따로 출발하지만 각자의 진군
루트에서 여진 족들을 토벌을 하다가
사루 후라는 강 에서 다 같이 만나
누루 아치의 본진의 허투 알라로
들이닥치는 작전이었습니다 이중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유정의
동로구 소속으로 움직이기로 합니다
유정은 임지 나라는 후반기에 명나라
사령관도 참전했던 장수로 순천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싸울 때
미적지근하게 행동해서 이순신은 열받게
했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동로구 편입된
조선군의 강홍립은 도착해서 너무
놀랐다고 합니다 개판이어서 병사들
군계 빠져 있고 무기 상태도 엉망이고
조건도 너무 열악했다 강홍 님은
유정에게 가서 명나라 군의 총사령관인
양호에 병력과 물자를 조금 요청해
보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유정은
양호와 친하지 않다는 이유로 지원
요청을 하지도 않습니다 이건 비단
유정과 양호함을 문제가 아니었는데요
동선 남북 사루군 사령관들이 모두
서로 신경전을 버리고 있어서 부대간
긴밀한 연락과 협력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명나라의 네개 부대가 사르를 향해
출발을 하기는 하는데 본진 허투알라
있던 누루하치고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적군이 오는데 누치가 본진의 박힌채
가만히 있을 리가 없 죠 누르하치는
기병대를 이끌고 요동 곳곳을 누비며
지형과 길에 대한 탁월한 이해도를
바탕으로 명나라군 네개 부대를
차례차례 격파했고 네개 부대 중 남루
그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다
전멸했습니다 남루 그은 나머지 세개
부대가 전멸하는 거 보고 바로 후퇴해
버렸습니다 물론 조선군이 있던
동료분도 깡그리 격파했고 유정은
화약으로 자폭해 버리고요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죽습니다이 명나라 편에부터
사루 후 전조에 참전했던 해서 여진의
잔존 여호 와해되어 버렸고요 그나마
조선군이 대포로 환전하면 가장 잘
싸운 부대였습니다 강홍립은 살아남은
조선 병력을 이끌고 산자에게 진을
치고 끝까지 싸우지만 결국 대세를
거스리지 못하고
투항했다 그 유명하디 유명한 사루
전투입니다 루우 전투 당시 강홍립의
항복을 두고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습니다 강홍립이 출병하는 광해군이
강홍립게 상황을 봐서 잘 판단하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고이 말을들은
강홍립이 안 싸우고 투항했다 말을
많이 들어 보셨을 겁니다이 일화의
출처가 확실하지 않아서 마냥 믿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 현장에 나가 있던
강홍립게 광해군이 편지를 보내기는
합니다 내용은 명나라 장수들의 지휘를
꼭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지지않을
방도 찾으라는 편지였습니다 이런
내용을 싸우는 척만 해라라고
해석하기엔 비약이 그리고 조선군은
명나라 군대보다 더 열심히 싸웠고
정말 많은 수의 조선군이 전사합니다
사로우 전투의 대승으로 요동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누르하치의 후금에게
넘어왔고 1621년 누르하치가 심양과
요양을 함락시키고 후금의 수도를
심양으로 전도합니다 이제 남은 건
말리 장성을 뚫고 중국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음악]
누루 아치의 후금은 어떻게 이렇게
강할 수 있을까요 물론 명나라가 약한
것도 있지만 누르하치의 후금 군이
이토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군대의 군사력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겠지만 가장 기본이 되고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부대의 조직력
있니다 조직력 차원에서 명나라 구는
형편이 없었고 누루하치 후금의
조직력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그
조직력을 갖출 수 있었던 여진 종말의
제도가 있었는데 바로 팔기군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누루 아치가 명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훗날 후금이
청나라로 확장되어 청나라가 중국
전역을 지배할 수 있었던 제일 첫
번째 이유가 바로이 팔기군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팔기는 말 그대로 여덟
개의 깃발인데 팔기를 구성하는 가장
낮은 단위는 니루 있니다 원래 화살을
뜻하는 말인 니루 원래 여진족이
사냥에 나설 때 만드는 임시
조직인데요 누루 아치는 니루 민정은
물론 궁전까지 아우르는 기층 사회
조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누루 아치의
세력이 커질수록 니루 규모도 커지겠죠
누루 아치는이 많아진 니루 다시 재
편성하는데 니루 다섯 개를 모아 잘난
한 개를 편성하고 잘난 다섯 개를
모아 하나의 구사를 편성했는데이
구사가 바로 하나의 깃발입니다 팔기는
구사가 여덟 개가 있었다는 뜻이겠죠
누루 아치가 한창 해설해 진 격하고
다닐 때 누르하치의 여진 쪽에는 총네
개의 구사가 있었고 해서여진 다
격파하고 후금을 선포할 무렵에는 여덟
개의 구사가 형성됩니다이 여덟 개의
구사가 서로 다른 깃발을 써서
8기라니 황색 백색 홍색 남색네 가지
색깔을 썼고 그 각각은 가장자리의
테두리가 없는 사각형 모양의 전과
테두리를 두른 각형 모양의 양으로
나누어서 총 여덟 개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팔기는 군인은 물론
민간인까지 아우르는 사회 조직이기에
팔기는 후금이 아는 국가의 뼈대 구조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니까 후금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은 팔기 중 어느
하나에 속했다는 거죠 그런데 누루
아치의 후금은 부족 단위로 흩어져
있던 여진족을 다 통합하고 기존의
부족 단위 체제를 8기로 확대 편성한
것이라 호쇼이 버일러 라고 불렀던이
팔기의 기주를 그들의 자치권이
상당했습니다 누루 아치의 직속 팔기는
여덟 개 중에 두 개밖에
[음악]
없었어요 루우 전투 후 심양과
요양까지 점령한 누루 아치는 이제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됐습니다 요동성
만리장성으로 올 때 반드시 지나쳐야
할 정도로이 만리장성 바로 앞에
영원성이 아는 곳이 있습니다 영원성의
담당자가 원숭환이 아는 문관이 있는데
1626년 누루 아치가이 원숭환이
진두 지위 는 군대에 막혀서 패배한
겁니다 원숭환은 부임 전부터 후금과의
전쟁에 늘 관심을 두고 있었고
영원성을 온 것도 자원에서 왔습니다
부임 하자마자 원숭아 곧바로 성
보수공사에 돌입해 방어에 만전을
기했고 인맥을 총동원의 포르투갈로부터
홍이 포라는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대포를 30분이나 구입했었죠 누루
아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위력을
가진 홍인 포에 깨진 것도 맞지만
영원성 전투에서 명나라가이긴 건
원숭환의 뛰어난 용병술과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죠 누루 책에 있어
명나라와의 싸움에서 최 초의 패전이
있는데이 후유증 때문이었을까요 영원성
전투 후 얼마 안 있어서 누루 아치가
사망합니다 누루 아치도 몸 상태가
하루가 멀다 하고 안 좋아지고 있으니
후계를 정해야만 했습니다 여에 잘
쌓아놓고 후계를 제대로 매듭짓지
못하면 자기 죽고 나서 후금이 와해
될게 뻔하니깐 유목 민족들에게는 장자
승계 원칙이 없어서 언제나 고질적인
내분의 씨앗이 됩니다 더군다나 팔기의
각 기주이 힘이 워낙 강력하니 누루
아치는 차라리 자기사 후 팔기 기주의
집단 통치를 하라고 유언을 남기고
사망합니다 그렇게 호쇼이 보일러의
집단 통치 체제가 시작될 줄 알았으나
누루 아체의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는 집단 통치 체제를 원치
않았습니다 홍타이지는 비록 여덟 번째
아들이긴 했지만 엄마 쪽 헬통 입김이
셌고 그의 능력도 출중하여 누루
아치를 따라 전쟁을 누비며 여러 공을
세워서 팔기 기주 중 한 명이었습니다
루후 전투 때 명나라 서로 군을
격파한 것도 홍타이지 있죠 집단 통치
일원이었던 홍타이지는 아버지의 우려와
다르게 본인만의 독재 권력을
원했습니다 다른 집단 통치의 기주를
보일러이다 냐고요 일부 반발했습니다
아민과 망굴 타이가 홍타이지 덤벼
들었는데 다른 집단 통치 일원이었던
다이샤이 홍타이지의 지지하면서
홍타이지는 아민과 망굴 타이를
제거했고 기주를 자기에게 우호적인
사람으로 대체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홍타이지가 유일무의한 독재 권력을
구축했는데요 집단 통치를 해체하고
독재 권력을 구축해 가는 과정에서
자기 아버지 누루 아치가 팔기 중
두기만 직속으로 삼은 곳에서
홍타이지는 세기를 자신의 지칼 8기로
삼습니다 후금의 2대 황제로 안정적인
입질을 다진 홍타이지는 이제 다시
명나라와의 전선에 집중하기로 했는데
아버지 누르하치가 영원성에 싸우다
졌죠 홍타이지는 조금 더 신중해지기
합니다 명나라와 싸우기 전에 후금의
여진족 양 옆으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몽골과
조선이었다 그럼 역사 돋보이 있습니다
저희 역사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 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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