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의 군사력은 어땠을까? 중국전쟁사의 변천사 3부 최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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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의 군사력은 어땠을까? 중국전쟁사의 변천사 3부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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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 도포기 있니다 중국의
군사사 전쟁 전술의 변천사를 통해
보는 중국사 마지막 3부입니다 중국은
당나라 때까지 기병이 군대의 가장
핵심이자 메인이었는데 송나라 터는
보병이 강화되는데 그 배경엔 바로
화기의 탄생이 있었습니다 송나라
이전에도 화약이 있었지만 송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화약을 군사적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송나라
서기 천년 장수 당복이 최초로
화약으로 폭발하는 무기들을 만들었죠
이때까지만 해도 포탄을 투척하는
정도였고 시간이 좀 더 지난 12세기
경에 드디어 화포를 만들어냅니다 다만
송나라의 군사력이 워낙 약체다 보니
화포 사용 영향이 현격하게 떨어졌고
명나라 때부터 화포를 적극 활용하죠
명나라의 대표적인 화포는 불랑기포
호준포 백자보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청도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가장 먼저
도입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한중일
중에서 가장 먼저 조총을 도입한 건
중국 명나라 있습니다 일본이 조총을
만들어낸 건 서양의 아쿠 버스라는
화승총이 전래된 것인데이 화승총이
일본에 건너간 건 16 6세기
동아시아 바다를 주름잡던 명나라
대해적 왕직 배에서 표류하며 전래된
것이랍니다 화약으로 무기를 만들어낸
건 중국 속 나라이지만 그 화약이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했던 원나라 때
서양으로 넘어갔고 서양에선 화약
무기를 개인 소지할 수 있는 총으로
만들어 냈던 거죠 포르투갈인들이
아시아로 진출하며 마카오까지
진출했는데 이때 포르투갈 군이
소지하고 있던 화승총이 명나라에 처음
소개되었고 조총이 이름을 붙인 것도
명나라 있습니다 외구 토벌하기 위해
남방에 있던 첫 기광 역시 원 원진과
다불러 조총 부대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보병이 총을 소지하면서
보병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고 첫
개강의 원항 역시 보병의
전술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기병이 약화된
건 아니었습니다 명나라는 북방의 몽골
오이라트 부족과 또 만주 지역의 여진
족들을 제압하려면 그들을 상대로는
기병대의 필요성이 절대적이었던
명나라의 경우 북방은 기병 위주
남방은 보병 위주였다 볼 수 있죠
임진 해라 때 조선으로 들어온 명나라
원군은 처음엔 이어송 끄는 요동
병력이었다 물론 이들이 빼앗긴
평양성을 파란하 했다지만 이호성의
부대는 기병 위주에 여진족에 특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보병 위주였던
일본 군과는 맞질 않았습니다 정유재란
때 재 투입된 명나라 원군은 유적
양호 진린 등 중국 남방의 보병
위주의 부대였습니다 이들의 주력
무기가 화포 있고 그래서 임진란
양상을 보면 정유재란 때 투입된
명나라군이 훨씬 큰 활약을 했던
겁니다 물론 이어백 마귀 등 기병
위주의 부대도 투입됐고 정유재란 때
투입된 명나라 군은 기병 보병이 잘
규정 잡힌 부대였던 거죠인지 네란
이후에는 명나라가 노밀 총이라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더 개량되고
강화된 조총을 도입했으며 또
네덜란드로부터 홍이 포라는 포신
길이가 무려 2미터가 넘는 서양식
커버리 수입해이를 자체 생산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렇다면 명나라의 이민족
대응 방식은 어땠을까요 당나라는
도호부로 통한 기이 정책 말기에는
절도사 제도를 시행했지만 절도사가
군벌로 성장해 버리니 송나라 때는
별다른 대안이 없이 절도사 제도를
폐지하여 군벌의 성장을 강력하게
억제하다 국방력이 지나치기 약해져
이민족들의 침입에 끝없이 시달렸습니다
명나라의 경우 지방군은 위소제
운영했습니다 군사 112명을 모아
백호라고 합니다 그 백호가 10개가
모이면 호고 그 천호가 다섯 개가
모이면 1위입니다 따라서 1위는 약
5,600 명이 하나의 위인데
명나라는 전국적으로 주요 요충지의
위를 설치하였고 고려 말 우왕 때
명나라가 용토를 요구한 것도 천령
위지아 그리고 각 지역의 이민족들의도
위를 맡겨서 그 이민족들을 명나라가
관리할 수 있도록 그렇겠죠 명나라
정부에서 내린 위의 관직을 받으면
명나라와 교육할 수 있는 증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생계의 명나라와의
교육이 필수적이었던 이민족들의
부족장들 그 관직을 받았던 거죠
대표적인 예로 암록 이북의 여진족들이
이끌던 이만주 건주 위를 담당했고
두만강 이북의 여진 족들을 이끌던
먼터 무가 건주 좌 위를 담당했죠
그리고 명나라는 각 위에서 둔전제를
시행하게 하여 자체적으로 군량 및
보급을 자급 저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무슨 문제 가
생길까요 이렇게 군사적 병영의
자치권을 주면은 중국은 항상 군벌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명나라는 옛 당나라
말기나 5대 10국의 절도사처럼 그
정도까지 군벌로 확대되지는 않았단
말이죠이는 군벌로 성장할 기미가
보이면 바로 명나라 정부에서 아무
죄나 때려서 소환한 후 죽여 버렸기
때문입니다 특히 명나라 황제들은
환관들게 자지우지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부패한 환관들은 혹시나 저
군벌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해
툭하면 불러서 죽여버리기 일수였습니다
이름은 분명 군벌로 인한 내라는
이연에 방지할 수 있다지만 이민족과의
전쟁에서는 절대 이길 수가 없게
되죠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명나라
말기 요동의 패권을 두고 여진족
후금과의 전투였고 루우 전투에서
명나라 주력군을 모두 격파해 만주를
제패한 무페의 전설 여진족의 두루
아치가 이제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관내로 진출하려고 할 때 유일하게
막힌 곳이 만리장성 입구였다 영원성이
있습니다 영원성을 담당하는 원숭환은
홍이포를 대량으로 성에 설치하고
천재적인 용병수 발휘했으며 조선
북방에서 가도에서 수군을 키우던
모문룡의 수군 병력도 흡수했습니다
누르하치는 영원 대첩에서 패배 후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으며 누루하치 사우
뒤를 이은 그의 아들 홍타이지
영원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죠 그런
구국의 영웅이었던 원숭환의 처형한 건
다름 아닌 명나라 본국이 있습니다
거기에 명나라는 정치도 부패에 있어서
결국 내부 반란으로 명나라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주인은
만주족의 청나라가 되죠 청나라 군은
한족의 군대가 아닌 만주족의
군대였던만큼 당연하게도 기병대가
위주였습니다 청라 의 행정 조직 및
군사 조직을 팔기군이라고 합니다
팔기군 누르하치가 처음 조직했는데
누르하치가 지휘하는 팔기군 기병대는
확실히 지형적 이해도만 높으면
최강이었던 패권을 둔 전투 사루
전투에서 화기로 무장한 명나라 군대를
8기 군의 기병대가 이리저리 휘자
넘으며 명나라군 9만 명 중에서 4만
5천 이상이 전사했습니다 사실상
전멸이 사루 전초의 패전은 명나라 측
실수도 있었는데 사르 전투 때 투입된
요동 병력은 대부분 임진열 때
원군으로 투입되었던 부대였습니다
지네한테 투입된 명나라 원군은
전통적으로 북방이 여진족을 막던 기병
일부와 화기로 무장한 보병 중심의
남방군이 적절히 섞여 있었다고
했잖아요 이들이 보병 위주의 일본군을
상대로는 잘 싸워도 북방의 만주족을
상대로는 활약하기 힘들었던 겁니다
양호 유정 등 전통적인 요동 병력
출신이 아닌 남방 출신의 지휘관들도
만주족과 싸운 경험이 별로 없었던
거고요 누루 아치의 뒤를 리은
홍타이지는 몽골족 병합후 몽골 인들로
구성된 8기 몽골을 조직 하고는
청나라에 기방 있는 세계 최강이었던
입권 후 중국 전체 를 차지한
청나라는 한죽 돌로 구성된 부대
노경의 별도로 조직했습니다 노경은
보병 위주에 조총과 화포로 무장한
화기 중심이었습니다 청나라가
영리했던게 중국 남방의 명나라 부흥
세력을 진압하는데 팔기군 보다는
노경은 더 앞세웠습니다 물론 한족들을
한족들로 제압하게 한다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중국의 군사사
살펴보면 북방의 병력이 남방을
공격하거나 남방의 병력이 북방을
공격하면 서로 다른 전술 차이로 인해
실패하는 경우가 있죠 그러나 청나라가
명나라 부흥 세력을 진압할 때는 같은
전술로 쓰는 노경으로 투입해
효과적으로 진압했고 더불어 그동안
기병 위주의 청나라도 한쪽들로부터
화기를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화기에 대한 이해도와 능률을 높입니다
청나라의 군내가 얼마나 강했는지
청나라의 정복 전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요 청나라의 사대 왕제 강희재
때는 대만을 정벌하고 러시아의 아시아
진출을 저지시키고 최후의 유목
제국이라고 하는 서몽골 중가르 제국의
건설자 갈단 칸을 물리쳐 중 가래를
복속시켰다 육대 왕제 관제는 십전
무공이라 하여 중 가래를 완전히
멸망시켜 놓 위구르의 편입시켰고
티베트에서 종족이 반란을 일으키자이를
진압한 뒤 네팔까지 진출했으며 미안마
원정에 나서기도 또 베트남에도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수구는 확실히
약했습니다 명 나라나 청 나라나
강력한 해금 정책으로 방어를 위한
수군이뿐 정복전쟁을 위한 수군은
아니었습니다 대만 정벌도 수군으로
이루어진게 아니라 그저 육군을 대만에
수송하는게 전부였죠 항저우 지인의
청나라 수군 기지를 배치하였으며
대부분 한족들 일부 기군도 있었
있었지만 정말 최소한의 병력이었다
걸제 말기부터 청나라 황실이 부패해
있고 청나라 정보은 사치스러워 있고
태만해면서 8기의 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게 전성기 시절에 그 청나라
병력이 만나 싶을 정도로 그 군사력이
하락합니다 유럽에서 근대식 무기가
만들어지고 있을 때도 청나라는
무시했죠 그 결과는 아편 전쟁 때 뼈
아픈 치욕으로 돌아왔는데 청나라 함대
9척이 영국배 두척 그것도 정식
군함이 아니라 동인도 회사 소속의
호위선 정도였는데 청나라 29척
중에서 2척이 괴멸 영국의 배는
근대식 철갑선이고 청나라 배는 목선인
뭐 당연한 결과였죠 태평 천국 운동
때는 반란군을 진압하러 간 팔기군
기병대로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태평천국군 진압했던 건 각 지방별로
일종의 자경단이 할 수 있는
향용이라는 부대였고 훈한 성에서
중국본이 조직한 상군 혹은 안후이
성에서 이홍장이 조적한 회군 등이
있었습니다 이후 청나라가 정식
개항하면서 중국본 이용장 좌종 등등
등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했던 한족들을
등용해 일명 양무 운동이라고 군대
근대화에 착수합니다 수저 후에 중국
최초로 서양식 무기 공장 양파국
만들고이를 상하이로 옮기면서 강남
기기 제조 총국 만들었습니다 난징에
금릉 기기 국을 만들어 역시 서양식
무기들을 제작했고요 좌종당계 주도하에
푸저우 선정 국에서 윤선이 증기선을
만들어졌고 텐진의 천진 기기 국과
군화 기기 총국이 문을 열었죠 강남
기기 제조 총국 금릉 기기 제조국
천진 기기국 군화 천국을 양무운동의
4대 군수 공장으로 꼽습니다 이외에도
전국적으로 총 24개의 중소 군수
공장들이 있었죠 또 텐진의 무비
학당이 일종의 사관학교를 만들어서
근대식 교육으로 젊은 장교들을
육성했습니다 양무운동의 노력들이
누적되어 북양 함대 남양 함대 복권
함대 총 세 개의 함대가
조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중 남양
함대와 복권 함대는 1884년부터
1885년 청프 전쟁의 패배로
사라졌고 이후로 청나라 정부는
이홍장의 북양함대 지원을 몰빵함
입니다 이홍장의 북양 함대 중 독일제
정원함 진원남매 배수량 7,000
톤의 막대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죠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함대였다 영국이나 독일의 해군과도
만먹는 규모에 25 척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태후가 부경
함대에 대한 지원을 끊어 버리고
이홍장 자신의 권력 기반 이을까 봐
전쟁의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다가이
강한 함대가 1894년에 1895년
청일 전쟁의 패배로 그 영광을
잃습니다 청일 전쟁 패전의 책임으로
이홍장은 물러나고 이홍장의 후임이었던
위안스카이가 다시금 북양 군대 재건을
꾀했고 부양 군대는 어느 정도 회복을
했지만 청나라의 정식 군대라 이보다는
위안스카이 개인 병력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북양 군벌이 부르죠
1901년부터 서태후도 근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신정이라는 대대적인
근대화 개혁에 들어가고 무비 학당을
전국적으로 확대했으며 각 지방별로
신군이 아는 근대식 부대를 창설합니다
다만 이미 중국 저역에 만주족 청나
정부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기에 각
지방별 신구는 옛날에 그 향용 럼
청나라 조정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고
뭐 자기네 지방만 지키자 않는
자치적인 성격이 훨씬 강했습니다
더불어 각 지방별 신군은 청나라를
타도하고 한 종 만에 공화 정보를
수립 하자는 공화파 젊은 사람들이
포진에 있었고 결국 1911년 신해
혁명이 터졌죠 청나라의 중앙군이 할
수 있는 정규군은 사실상 위안스카이
개인 병력이나 다름 없던 북양 군벌이
있는데 위안스카이는 도리어 청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자기 이 군벌의 지지에
힘입어 베이징 정부를 수집합니다
위안스카이 사 후에는 부경 군벌이
환계 군벌 직계 군벌 봉천 군벌로
쪼개졌습니다 각 지방별 신군은 베이징
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며 지방
군벌로 되었죠 따라서 청나라 멸망
직후에는 위안스카이 부하들이 수립한
베이징 정부의 군벌들 각 지방의
군벌들 분류되었고 순원 그리고
수원에서 이어지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남방의 지방 군번들은 이상이나
엔 시상 같은 지방 군번들은 북벌에
나서 베이징 정보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세웠던 겁니다 이후
장제스는 지방 군벌들을 통합시키는
과정이 연속이었죠 다만 1949년
국공 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군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군에게
패배하는데 마오쩌둥의 공산군 이른바
오늘 날인 중공군은 중국 공산당
초기에 1차 국공 결렬 후 조직한
홍군의 시작해 1937년 중일 전쟁에
투입되기 위해 2차 국공 합적으로
홍군은 팔로군과 신사군 발전하고
마지막 국극 내전 된 중공군이 된
겁니다 국공 내전 시작 때까지
중공군이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국민당군의 상당수가 중공군을 이탈해
버리죠 그리고 625 때 투입된
건데이 중공군은 홍군 때의 항쟁
중일전쟁 국공내전을 연이어 겪었기에
625 때까지만 해도 야전 경험이
상당했던 베테랑들이 있죠 그러나 이후
1년에 공산주의 특유의 그 비효율적인
부대 운영으로 군사에게 매우
약화되었다가 덩 셔핑 이후 현대와
개혁을 거쳐 오늘 날의 중공군에
이어지는 거랍니다 그럼 역사
도박이었다 그이 신간도서 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고려
갈등사례 총 망라하는 역사책으로
고려의 모든 것을 담았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온오프라인 매장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저희 역사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 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I
